‘느린 학습자’ 양육, 내 탓인가? 자책을 넘어

[논문 밖 인터뷰] ‘청소년 느린학습자 양육자 자조모임’ 연구한 이보람
청소년성문화센터에서 체험형 성교육을 진행 중인 이보람 활동가. 올해 석사학위논문 「모성규범을 넘어 돌봄커먼즈로 : 느린학습자 청소년기 양육자 자조모임을 중심으로」를 발표했다. (인터뷰이 제공)
[연구 소개] 이보람의 석사학위논문 「
모성규범을 넘어 돌봄커먼즈로 : 느린학습자 청소년기 양육자 자조모임을 중심으로
」는 한 지역의 느린학습자 자녀 양육자 자조모임에 참여하는 여성들을 만나 이들의 돌봄경험을 통해, 개인에게 맡겨진 돌봄 책임을 구조적 불평등과 제도적 공백에 대한 사회적 질문으로 어떻게 전환할 수 있을지 탐색한 논문이다.
‘느린 학습자’라는 말이 교육·복지 현장에서는 자주 쓰이지만, 아직 대중에게 익숙한 용어는 아닌데요. 청소년성문화센터 활동가로 일하면서 ‘느린 학습자’의 양육자 자조모임에 관한 연구를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청소년이 성과 관련된 문제로 우리 기관을 찾을 때, 그 곁에는 대체로 주 양육자인 어머니가 함께 있었어요. 이분들을 만나면서, 양육과 돌봄의 책임이 어머니에게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다는 점을 보게 되었습니다. 자녀의 어려움에 대응하고, 기관을 찾고, 상담과 교육을 연결하고, 일상생활을 조정하는 일까지 대부분 어머니의 몫이 되는 경우가 참 많더라고요. 처음에는 이를 개별 가족의 어려움으로 이해했지만, 현장에서 비슷한 상황을 계속 보게 되면서 이것이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왜 자녀 돌봄은 주로 여성의 책임으로 여겨지는지, 왜 어머니의 헌신은 당연한 것으로 기대되는지, 그리고 양육자들이 사회적 지원을 받기보다는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사람으로 여겨지는지 질문하게 되었죠.
제 연구는 그중에서도 현장에서 마주한 ‘느린 학습자’와 그 어머니들로부터 출발했하는데요. 느린 학습자, 흔히 경계선 지능이라 불리는 이들은 단순히 IQ 71에서 84 사이라는 수치만으로는 규정될 수 없습니다. 이들은 장애와 비장애, 일반교육과 특수교육이라는 이분법적 제도 사이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채 소외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이 청소년들을 돌보는 어머니들은 극대화된 불안 속에 살아가고 있었지만, 기존 연구들은 대부분 아동기 양육 방법에만 집중되어 있더라고요. “아동기에는 주변의 도움으로 버틸 수 있다”는 식의 서술을 보며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청소년기로 넘어가면 상황이 더 복잡해지기 때문입니다. 또래 관계의 미묘함, 사춘기라는 성적 발달 과제, 진로라는 장기적 고민이 겹치죠. 자녀 돌봄은 현재의 노동을 넘어 자녀의 미래까지 미리 걱정해야 하는 형태로 확장됩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청소년기 느린 학습자와 그 어머니들의 돌봄 경험이 학문적으로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고, 제 연구 주제로 삼게 되었습니다.
연구 과정에서 특히 고심했던 점이 있나요?
어머니들이 느끼는 죄책감과 복잡한 부정적 감정들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구조적 문제로 이야기할 수 있는 언어를 찾는 일이었어요. 어머니들이 겪는 고충이 개인의 부족함이나 양육 실패로 치환되기 쉬웠고요. 동시에 사회구조의 문제로 전환해 말할 수 있는 언어 자체가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양육자들이 느끼고 있는 돌봄의 책임을 사적 감정의 영역에 머물게 하지 않고, 공공의 자원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어요.
논문에서 남아의 느린 발달은 ‘남자애라서 늦는다’는 통념 속에서 비가시화되고, 또 여아의 느린 발달은 ‘조용함과 순응성’에 의해서 비가시화된다는 대목이 인상 깊습니다. 성별화된 발견과 비가시화에 대해 페미니스트로서의 문제의식이 작동했을 것 같아요
처음 인터뷰 참여자를 모집했을 때, 예상과 달리 남자 청소년의 양육자들이 주로 참여 의사를 밝히셨어요. 여자 청소년의 양육자는 거의 모집되지 않았고요. 이 지점에서 단순한 모집의 어려움이 아니라 “왜 느린 학습자인 여자 청소년의 경험은 이렇게 드러나기 어려운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죠. 결국 총 15명의 인터뷰 참여자 가운데 남자 청소년 양육자가 10명, 여자 청소년 양육자가 5명인데요. 구성의 불균형 자체가 느린 학습을 경험하는 여자 청소년의 어려움이 양육자 자조모임이나 지원체계 안에서도 충분히 언어화되거나 가시화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신호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연구를 진행하며 느린 학습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 역시 성별화되어 있다는 점을 확인했어요. 남자 청소년의 경우 ‘남자아이니까 원래 산만하다’, ‘조금 늦을 수 있다’는 식의 통념 속에서 발견이 늦어질 수 있어요. 반면 여자 청소년은 ‘얌전해야 한다’, ‘배려해야 한다’, ‘학교생활에 무리 없이 적응해야 한다’는 일종의 여성성 규범 속에서 자신의 어려움을 감추거나, 주변이 그 어려움을 성격이나 태도의 문제로 해석할 가능성이 있었어요. 또한 겉으로 문제를 크게 드러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필요한 지원의 대상에서 더 쉽게 제외될 수도 있고요.
누구의 어려움이 더 빨리 발견되고 지원되며, 누구의 어려움이 개인의 성격이나 적응의 문제로 해석되어 늦게 발견되는지를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거리에서 성교육과 관련한 캠페인 중인 이보람 활동가. (인터뷰이 제공)
이어 자녀의 어려움이 발견되고 지원으로 연결되기까지, 그 역할의 부담이 어느 양육자에게 집중되는지도 젠더 관점에서 보니 중요하게 보이더라고요. 여성 양육자는 자녀의 특성을 이해하고, 정보를 찾고, 학교·상담·의료·복지기관과 소통하며, 필요한 지원을 요구하고 조정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었는데요. 이러한 노동은 ‘당연한 엄마의 역할’로 간주되고 있었어요.
느린 학습자 지원 정책이 학습 능력이나 교육서비스의 문제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상성’에 대한 요구와 ‘성별 규범’이 결합할 때 누군가의 어려움은 보이지 않고 감춰지거든요.
자조모임을 통해서 “내가 잘못해서 아이가 이렇게 된 것은 아닐까”라고 자책하던 여성들이 “왜 책임은 늘 어머니에게만 돌아오는가”라는 사회적 질문으로 전환한다고 짚어주셨어요. 현장에서 양육자들을 직접 만나며 이러한 전환을 확인한 순간들을 이야기해주세요.
처음에는 어머니들이 자녀의 어려움과 돌봄의 부담을 자신의 부족함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어요. 많은 분이 죄책감과 불안을 개인만의 감정으로 감당하고 계셨죠. 그러나 자조모임에서 서로의 경험을 나누기 시작하면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비슷한 어려움을 가진 사람이 있음을 확인하면서, 그 고통이 더 이상 개인의 실패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함께 다뤄야 할 문제라는 인식으로 옮겨가더라고요.
특히 자녀의 교육, 관계, 진로와 자립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전환이 뚜렷하게 나타났어요. 이전에는 ‘내 아이를 어떻게든 자립시켜야 한다’는 개별적 책임으로 고민했다면, 모임 안에서 ‘느린 학습자 청소년이 성인이 된 뒤에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는 어떤 지원과 조건을 마련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확장되었습니다. 개별 양육자의 불안이 교육, 돌봄, 주거, 일자리, 지역사회의 지원을 포괄하는 공적 책임의 문제로 다시 구성되었어요.
이 과정을 보면서 자조모임의 대화가 단순한 하소연이나 정서적 위로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서로의 눈물을 받아주고 위로하는 일 자체도 매우 중요해요. 다만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돌봄의 책임을 왜 양육자 개인, 그중에서도 ‘엄마’에게만 떠넘기는지 질문하고, 사적인 고통과 죄책감을 사회를 향한 요구로 바꾸는 역할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았어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머니들은 제도와 시스템의 변화를 요구할 수 있는 정치적 주체로 서게 됩니다.
느린 학습자를 양육하는 부모 간의 간극을 짚은 부분이 눈에 띕니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능력과 성취가 과도하게 강조되고, 모든 아이가 정해진 평균치와 표준 발달 경로에 도달해야 한다는 획일적 기준이 강하게 작동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각자 고유한 속도와 특성, 삶의 색깔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사회는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아이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보다, 끊임없이 교정하고 보완하며 ‘고쳐야 하는’ 대상으로 바라보곤 하죠. 마치 고장난 부품을 수리하듯 아이를 대하는 언어와 제도가 작동하는 것입니다. 이 정상성의 기준이 곧바로 ‘임신 중에 일을 해서, 맞벌이 하느라, 고령 출산 때문에’ 등과 같은 어머니에 대한 비난과 자기검열로 너무나도 손쉽게 이어져요.
그러다 보니 어머니들은 자신의 삶을 갈아 넣었다고 말할 정도로 헌신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도 자녀에게 어려움이 나타나면 “엄마가 노력을 덜 해서 그렇다”, “더 일찍 병원에 데려갔어야 했다”는 식으로 방임의 책임을 추궁받습니다. 반대로 자녀를 세심하게 살피고 반나절을 함께하며 일상을 관리하면 “너무 예민하다”, “과보호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어머니들은 무엇을 하든 비난받을 수 있는 이중구속의 상황에 놓이게 돼요. 돌봄을 함께 나누어야 할 가족임에도, 서로의 충분한 지원군이 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 다른 가족 구성원은 “아이는 알아서 큰다”며 어려움을 축소하거나, 결과적으로 방관자적 태도를 취하기도 하죠.
이러한 관계적 돌봄 노동의 부담은 가정 밖 제도와 시장에서 강화됩니다. 느린 학습자에 대한 이해와 지원이 부족한 교육 현장에서는 교사들조차 그 특성을 충분히 파악하거나 지원하기 어려운 조건에 놓일 수 있거든요. 그 결과, 필요한 교육적 지원이 어머니의 훈육과 관리 책임으로 다시 전가되기 쉽습니다. 또 공교육에서 충분한 도움을 받지 못한 양육자들이 사교육의 도움을 받으려 해도, 느린 학습자라는 사실을 알리자 학원비를 일반적인 수준보다 세 배가량 높게 요구받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이보람 씨는 성평등 활동가 양성 교육도 하고 있다. (인터뷰이 제공)
‘모성 비난’을 끊어내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평균 수준에 맞춰야만 정상이고 성공한 삶’이라는 단일한 기준부터 바꿔야겠죠. 교육과 복지, 노동과 지역사회 지원체계는 아이를 표준에 맞추는 데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발달 속도와 삶의 방식이 존중받을 수 있도록 설계해야 해요. 느린 학습자 청소년에게 필요한 것은 정상에 가까워지라는 압박이 아니라, 자신의 속도로 배우고 관계 맺고 살아갈 수 있는 실질적 조건이거든요.
자립만을 유일한 목표로 삼는 기준도 다시 질문해야 합니다. 누구나 어떤 시기에는 타인과 제도에 의존하며 살아가고, 의존은 실패나 미성숙의 증거가 아니잖아요. 그러므로 느린 학습자 청소년에게는 ‘자립할 권리’뿐 아니라 필요한 지원을 받으며 ‘의존할 권리’, 지역사회 안에서 안전하게 살아갈 권리 역시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양육자들이 모임을 통해 ‘좋은 엄마’ 규범을 넘어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를 모색하게 된 것이 이 논문의 가장 중요한 발견 같아요.
한 어머니는 자신을 “고립된 섬 같다”고 표현했지만, 그 섬에 머물러 스스로를 파괴하는 대신 자조모임을 통해 서로와 연결되기 시작했어요. 또 예전 같으면 시어머니가 아이를 핑계로 자신을 비난할 때 죄인처럼 눈물을 흘리거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겠지만, 모임을 통해 “누구의 탓도 아니고, 이렇게 태어난 것일 뿐이며,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요. 어떤 어머니들은 자신의 돌봄 경험을 사회복지사, 장애인 활동지원사, 인지학습센터 운영 등으로 확장하고 있었어요.
그렇다고 자조모임에서 멈출 수는 없어요. 지금까지의 제도는 ‘잘 버티는 양육자’를 전제해 왔다면, 앞으로는 의존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느린 학습자를 포함해 장기적이고 복합적인 돌봄이 필요한 상황에서 양육자의 헌신만으로는 지속 가능하지 않거든요. 이제는 양육자 개인의 희생으로 유지하는 구조를 바꾸고, 돌봄을 공적 책임으로 재배치해야 합니다.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제가 다루고자 했던 문제가 단순히 양육의 어려움이나 개인의 고충이 아니었다는 점이에요. 저도 그렇고 많은 어머니 양육자들은 늘 완벽한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 최소한 평균 이상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살아가고 있어요. 조금만 뒤처져도 궤도에서 이탈할 것 같은 불안이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으니까요.
돌아보면 논문이 아직 충분히 다루지 못한 부분이 많고, 실제로 제도화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도 더 연구가 필요하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특히 성별에 따라 ‘느림’이 해석되는 방식, 그리고 여전히 견고하게 작동하는 성별화된 편견과 고정관념은 앞으로 더 면밀하게 살펴봐야 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현장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연구로 기록하고, 그 연구가 다시 사회를 바꾸는 실천으로 이어지도록 고민하는 사람으로 계속 살아가고 싶습니다.
는 석사를 하면 명쾌하고 선명한 정답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나름 큰돈을 써서 대학원 진학했다. 페미니스트들의 둥지 성공회대 실천여성학과에 와서 질문과 갈등, 불편함을 계속해서 옆에 둔 채 뒤죽박죽 부딪히고 불화하면서도 살피며 살아가는 태도가 여성학을 하는 이유라는 것을 배웠다. 정답을 말하는 사람은 못 되었지만 후회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