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북·미 정상회담 앞두고 한국만 관중석에 앉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미 정상회담이라는 돌파구를 노린다. 김정은 위원장은 비싼 몸값을 부를 준비가 됐다. 선전 APEC에서 두 정상이 손을 맞잡는 순간, 한반도의 판은 완전히 새로 짜인다.
8월19일 트럼프 대통령이 “올해 안에 김정은 위원장과 만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REUTERS
8월16일 트럼프 대통령은 소셜미디어 ‘트루스 소셜(Truth Social)’을 통해 한·미 연합훈련의 대폭 축소를 지시했다고 발표했다. 하반기 한·미 연합 정례 훈련인 ‘을지 자유의 방패(UFS)’ 개시를 겨우 몇 시간 앞둔 시점이었다. 한·미 동맹 73년 역사에서 전례를 찾기 힘든 일방적 조치였다. 명분은 세 가지였다. 막대한 훈련 비용, 북한에 주는 ‘적대적이고 부적절한 신호’, 그리고 이란 전쟁과 관련한 한국 정부의 군사적 비협조다. 8월19일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매우 좋은 관계”라는 점도 과시했다. 이에 따라 한·미 군 당국은 UFS 훈련기간을 단축했고, 반격 작전을 상정한 2부 야외 기동훈련(FTX)은 전면 취소했다.
이는 단순한 군사적 결정이 아니며, 예산 절감 차원의 문제도 아니다.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장기간 교착상태에 빠진 북·미 관계를 바꿔보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고도화된 계산이 깔려 있다.
하노이 정상회담 결렬 이후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과 개인적 친분을 과시해왔다. 그는 김정은 위원장과의 관계가 “매우 훌륭하다”라고 자주 언급하며 친서 교환 사실을 알리기도 했다. 이는 북·미 정상회담의 상징성과 가치를 여전히 인정한다는 뜻이다. 동시에 해결하기 곤란한 북핵 문제를 자신이 안정적으로 통제하고 있다는 국내 정치용 서사이기도 했다. 그동안 미국 정부는 “완전한 비핵화 없이는 제재 해제도 없다”는 원칙을 유지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언제든 정상 간 결단으로 이 원칙을 뒤집을 가능성을 열어뒀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경주에서 열린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 때 김정은 위원장과의 만남을 희망했다. 글로벌 위기가 산적한 가운데, 극적인 평화 이벤트를 통해 외교적 입지를 다지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북한은 그의 거듭된 구애에도 침묵과 무시로 일관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하노이에서 뼈아픈 실패를 경험했다. 그에게는 실질적인 제재 완화나 안보 보장 조치가 절실했다. ‘사진 촬영용 만남’에 더는 소모되지 않겠다는 원칙이 확고했다. 하노이 정상회담 결렬 이후 북한 매체들은 ‘웅대한 작전’을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을 제대로 상대하기 위해 스스로 힘을 기르겠다는 구상이다. 이 과정에서 남한 배제 노선이 필요했다. 남한의 존재는 오히려 대미 협상력을 약화시킨다고 판단한 것이다. 윤석열 정권의 대북 긴장 조성 정책도 북한에 명분을 제공했다. 급기야 북한은 남북관계를 ‘교전 중인 두 개의 적대 국가’로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북·미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화하기 전까지 북한은 이 구상을 흔들림 없이 유지할 것이다.
북한이 하노이의 좌절을 교훈 삼아 마련한 협상력 강화 전략의 핵심은 군사력과 경제력이다. 그 목표점은 2월 열린 노동당 제9차 당대회였다. 9차 당대회 이전에 트럼프 대통령과 만나는 것은 협상력을 제대로 키우기도 전에 김을 빼는 일이었다. 실제로 북한은 9차 당대회에서 고도화된 군사력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2019년 하노이 정상회담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덩치를 키운 상태다.
5월14일 중국을 국빈 방문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만찬장에 입장하고 있다. ⒸAP Photo
8월19일 트럼프 대통령은 “57개의 매우 강력한 핵무기를 가진 김정은 위원장과 아주 잘 지내고 있다. 올해 안에 그와 만날 것이다”라고 발표했다. 이에 8월19일 밤, 김여정 노동당 총무부장은 “미·한 합동 군사연습 축소에 대해 말한다면, 우리는 그에 대하여 평할 가치도 없다고 보며 전혀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라고 일축했다. 그러면서도 김여정 부장은 “두 지도자의 관계는 의연히 훌륭하다”라고 여지를 남겼다. 북한으로서는 다분히 계산된 탐색전 성격의 대응이라 할 수 있다.
2025년 만남을 거부한 북한은 2월 9차 당대회 이후 대미 협상의 문턱을 한층 높이 끌어올렸다. 비핵화를 전제로 한 ‘보상 교환 모델’은 북한 내부에서 완전히 폐기됐다. 9차 당대회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대내외에 선포하며, 이것이 북한 헌법에 명시된 ‘영구적’이며 ‘불가역적’인 권리임을 거듭 강조했다.
북한은 이미 2022년 ‘핵무력 정책법’ 채택과 2023년 헌법 명시를 통해 핵 선제 사용의 법적 기반을 마련했다. 나아가 핵 통제 체계마저 개편했다. 김 위원장 1인에게 집중된 핵무기 통제 및 사용 권한을 국가핵무력사령부 등 하부 핵심 조직에 위임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른바 ‘데드 핸드(Dead Hand)’ 체계의 구축이다. 외부의 타격으로 지휘부가 마비되더라도 핵 보복 시스템이 자동으로 가동된다는, 억제력의 신뢰성을 과시하려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신형 5000t급 구축함 진수식에 참석해 극초음속 전략 순항미사일과 전술 탄도미사일 탑재 능력을 과시했다.
6월23일 김정은 위원장이 5000t급 신형 구축함 출항을 지켜보고 있다. Ⓒ평양 조선중앙통신
일련의 조치는 명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북한의 핵무기는 더 이상 경제적 제재 완화와 맞바꿀 ‘협상용 카드’가 아니라는 것이다. ‘비핵화’라는 의제 자체를 협상 테이블에서 원천 배제하라는 요구이자, 핵보유국 지위 아래 새로운 협상 규칙을 만들자는 거센 압박이다.
핵무력의 제도적 완성이 전부가 아니다. 9차 당대회는 대남 전략의 근본적 전환을 거듭 확인하고 고도화하는 자리였다. 북한은 대한민국을 ‘제1의 적대국’이자 ‘교전 중인 두 국가’ 관계로 재정의했다. 남북 간 대화와 교류를 위한 기존 합의와 기구는 전면 폐기됐다. 이러한 대남 배제 전략은 오직 미국과의 협상에만 집중하겠다는 선포인 셈이다.
국제 정세 역시 북한의 대미 협상력을 키워주고 있다. 북한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파병한 유일한 국가다. 북·러 관계는 군사동맹 수준으로 끈끈해졌다. 미·중 대결 구도 속에서 중국 역시 북한의 든든한 뒷배로 자리 잡았다. 북한은 이란 전쟁 장기화로 난처해진 트럼프 대통령을 지켜보며 느긋하게 대미 협상 전략을 가다듬고 있을 공산이 크다.
트럼프 대통령이 직면한 대내외 상황은 복잡하게 꼬여 있다. 당초 트럼프 행정부는 이란의 핵심 군사시설과 핵 인프라를 정밀타격해 전쟁을 단기에 끝내겠다고 장담했다. 하지만 전쟁은 지루한 소강상태와 국지적 격화를 반복 중이다.
중동 전역의 방공망을 유지하느라 패트리엇 요격미사일 등 재고가 바닥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국제 유가는 폭등했고, 간신히 안정세를 찾던 미국 내 인플레이션은 다시 가파르게 치솟았다. 유권자의 80% 이상이 해외 군사 개입의 장기화를 우려하며, 트럼프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신뢰도는 곤두박질쳤다. 이는 11월3일 예정된 미국 양원 중간선거를 앞두고 악재가 될 것이다. 하원 다수당 지위마저 야당인 민주당에 내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이런 이유로 트럼프 대통령은 북·미 정상회담을 원한다. 이를 지렛대 삼아 이란 전쟁이나 가자 전쟁을 향한 비판 여론을 잠재우려 할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과의 만남은 트럼프 대통령 자신이 ‘글로벌 피스메이커’라는 정치적 서사를 구축할 가장 매력적인 소재다. UFS 연합훈련을 사전 협의 없이 전격 축소한 속내도 여기에 있다. 김정은 위원장을 다시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한 선제적 ‘선물’인 셈이다.
최근 카네기국제평화재단 등 미국의 주류 싱크탱크와 전문가 그룹의 기류도 변했다. 북한의 핵무장을 통제 불가능한 ‘기정사실’로 수용하는 분위기다. 달성 불가능한 비핵화 요구에 매달리기보다 무력 충돌 방지와 군비 통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다. 이른바 ‘안정적 공존(stable coexistence)’ 노선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던진 한·미 연합훈련 축소라는 승부수는 독자적 행위가 아니다. 9월부터 11월로 긴박하게 이어지는 굵직한 외교 일정과 정교하게 맞물려 작동하는 고도의 지정학적 게임이다. 다가오는 9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워싱턴을 방문한다. 북한 문제는 글로벌 공급망 의제와 더불어 양국 정상회담의 핵심 의제로 테이블에 오를 것이다.
선전 APEC, 김정은의 화려한 복귀 무대?
중국은 오래전부터 북한 핵·미사일 도발 중단과 한·미 연합훈련 중단이라는 ‘쌍중단’을 주장해왔다. 자국의 코앞에서 미국이 군사훈련을 축소하는 것을 중국은 환영할 수밖에 없다. 미국은 1월 베네수엘라 마두로 납치에 이어 멕시코, 쿠바, 파나마, 그린란드 등 서반구 지역에서 중국의 손발을 옥죄었다. 2월 말 이란 공격이 계획대로 조기에 마무리되었다면 이 역시 중국을 압박하는 효과를 거뒀을 것이다. 그러나 이란 전쟁의 장기화는 미국의 원대한 구상에 차질을 가져왔다.
지난해 10월29일 경주 APEC 정상회의에 참석한 이재명 대통령(오른쪽)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천마총 금관 모형’을 선물하며 설명하고 있다. ⒸAP Photo
9월 워싱턴 미·중 정상회담에 이어 11월에는 중국의 기술 허브인 선전에서 APEC 정상회의가 열린다. 미국 언론은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APEC 무대에서 다시 손을 맞잡을 것이라 보도했다. 김정은 위원장에게도 선전 APEC은 놓칠 수 없는 기회다. 핵보유국 통치자로서 당당히 국제 무대에 복귀하는 데뷔 무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덩치를 키운 김정은 위원장은 하노이의 수모를 결코 잊지 않았다. 이번에는 몸값을 아주 비싸게 부를 것이다. ‘핵보유국 지위에 대한 법적 인정’ ‘대북 제재망의 전면 해체’ ‘전략자산 한반도 전개의 항구적 금지’ 등은 애피타이저에 지나지 않는다. 메인 식탁에는 북한 경제발전을 위한 대규모 투자사업 청구서가 오를 수 있다. 앞으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치열한 밀고 당기기는 계속될 것이다.
이런 거대한 격랑 속에서 한국이 소외되는 ‘코리아 패싱’에 대한 우려도 커진다. 그러나 냉정해져야 한다. 현재 한반도라는 경기장에 링 위로 오른 선수는 오직 북한과 미국뿐이다. 우리는 관중석에 앉아 발만 구르고 있을 겨를이 없다. 이재명 정부가 ‘페이스메이커’에서 ‘피스메이커’로 전환하려면 절대적 시간이 필요한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뼈아픈 딜레마다.
지난 시절 남과 북이 마주 앉아 평화를 노래하던 낭만적인 경기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서늘한 사실부터 직시해야 한다. 경기장이 달라졌다면, 경기 규칙도 응당 달라지는 법이다. 이제는 새롭게 달라진 규칙을 익히고 연습하며, 우리도 참여하는 무대를 주도적으로 만들어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