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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고 안판석 감독, 인간과 세상 향한 관심… 지독한 ‘리얼리티’로 완성

고 안판석 감독, 인간과 세상 향한 관심… 지독한 ‘리얼리티’로 완성
‘봄밤’(MBC)을 연출한 안판석 감독(왼쪽)과 정해인 배우가 촬영 장면을 모니터링하고 있다. MBC 제공
‘봄밤’(MBC)을 연출한 안판석 감독(왼쪽)과 정해인 배우가 촬영 장면을 모니터링하고 있다. MBC 제공

[레드 기획]고 안판석 감독의 작품세계… ‘장미와 콩나물’부터 ‘연애박사’까지, 장르와 소재 달랐지만 일상 통해 사회 부조리 고발

‘봄밤’(MBC)을 연출한 안판석 감독(왼쪽)과 정해인 배우가 촬영 장면을 모니터링하고 있다. MBC 제공

“세상은 자주 이상하고 아름다운 사투리 같고. 그래서 우리는 자주 웃는데. 그날 너는 우는 것을 선택하였지.”(김승일, ‘나의 자랑 이랑’ 일부)

작고한 안판석 감독에 관한 글을 준비하다 시에 빠져들었다. 어느 날 신문 한구석에서 이 시를 발견했다는 그는 “오늘 하루는 살아남은 자들의 일상”임을 드라마로 표현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 같겠지만, 안판석 감독이 만든 드라마의 중심에는 늘 ‘인간’이 있었다. 허위와 모순으로 가득한 가부장제 안의 여성들, 계급사회의 한 축을 떠받치는 집사와 가정부들, 스튜어디스와 도서관 사서와 학원강사처럼 성실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 그가 보여준 것은 언제나 인간과 그들이 살아내는 일상 풍경, 그리고 세상이었다. 문학도 영화도 드라마도 결국 ‘인간들의 이야기’라는 명제는 당연한 듯하지만, 인간보다 사건이 앞서고, 화려한 화면 속에서 인간이 자꾸 주변으로 밀려나는 요즘 드라마들을 생각하면 그 당연한 명제가 사치처럼 느껴지곤 한다.

MBC ‘하얀거탑’. 공식 누리집 갈무리

‘짝’부터 ‘하얀거탑’ ‘밀회’ ‘연애박사’까지

내가 안판석 감독의 드라마를 처음 본 것은 ‘짝’(MBC)이었다. 젊은 여성이 누구의 딸이거나 아내가 아닌 직업을 가진 개인으로 대중문화에 등장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절, 스튜어디스들의 세계를 다룬 이 드라마는 혈연과 결혼 중심의 가족극을 넘어 새로운 세계를 보여줬다. 이후 ‘장미와 콩나물’(MBC)은 장미 같던 여성들이 결혼 뒤 시루 속 콩나물처럼 변해가는 현실을, ‘아줌마’(MBC)는 사회적 멸시를 받는 ‘아줌마’가 마침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걸 통쾌하게 그렸다.

따뜻하고 유쾌하게 여성과 가족을 그리던 그의 드라마는 ‘하얀거탑’(MBC)을 기점으로 확장됐다. 로맨스의 배경이나 생명을 살리려는 의사들의 무대가 아닌 정치적 공간으로서의 병원. 선과 악을 구분하기 힘든 인물들의 협잡이 일상이 된 풍경은 낯선 것이었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은 익숙했기에 우리는 그 이야기에 공감하며 몰입했다.

JTBC ‘밀회’ 스틸컷. 공식 누리집 갈무리

이후 ‘계급 3부작’으로 불리는 ‘아내의 자격’과 ‘밀회’(JTBC), ‘풍문으로 들었소’(SBS)는 위선과 불의로 가득한 상류층의 세계를 리얼하게 보여줬고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JTBC), ‘봄밤’(MBC), ‘졸업’(tvN)에서는 사랑에 집중했다. 가장 최근작인 ‘협상의 기술’(JTBC)은 차가운 협상의 세계를 움직이는 건 결국 ‘인간’임을 보여줬다. 그리고 다음 작품 ‘연애박사’(ENA, 2026년 10월5일 방영 예정)가 우리에게 도착하기 전인 2026년 8월12일, 그는 세상을 떠났다.

안판석 감독은 인간을 중심에 두되 세상을 향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아니, 당대를 제대로 담아내는 것이 드라마의 뼈대라고 여겼다. “드라마는 당대를 다루고 표현해야 하고, 또 그걸 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은 같이 고민”해야 한다고 말하던 그에게 리얼리티는 허구의 세계를 진짜처럼 보이게 하는 필수 조건이자,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납득하게 하는 토대였다.

로맨스에 덧댄 위선과 불의, 풍자와 해학

그런 그가 인간을 둘러싼 관계들 속에서 포착한 세상의 질서는 “명료한 세계관”으로 통칭할 수 있을 것이다. ‘풍문으로 들었소’에 나오는 말로, A와 B를 이기려면 이보다 힘센 C가 있으면 된다는 힘의 논리에 입각한 세계관이다. 누대에 걸쳐 ‘갑’으로 살아온 대형 로펌 대표 한정호(유준상)는 아들의 아이를 낳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며느리로 들이게 된 서민층 자녀 서봄(고아성)에게 이 세계관을 주입한다. 그는 이 세계관이 지배하는 사회를 가부장제와 계급으로 압축해 보여줬다. 가부장제는 가족의 얼굴로, 또는 통념과 제도의 형태로 나타나 개인의 선택을 통제한다.

‘아줌마’의 오삼숙(원미경)은 자신을 멸시하고 착취하는 가족에게서 겨우 벗어나지만 곧 호주제라는 제도를 만난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연하남과의 연애도, ‘봄밤’의 싱글대디와의 연애도 가족의 반대에 부딪힌다. ‘풍문으로 들었소’에서 “그랜드한 품격”을 앞세우지만 사실 위선과 차별로 내면을 채운 ‘갑’의 세계는 혈통과 상속을 통해 보존된다. 그 세계에서 가족은 사랑으로 묶인 곳이 아니라 권력을 대물림하는 곳이다.

교육 역시 계급과 권력이 재생산되는 통로다. ‘아내의 자격’의 국제중 입시 경쟁, ‘밀회’의 음대 입시와 재단을 둘러싼 비리, ‘졸업’의 서울 대치동 학원가가 그렇다. 병원도 다르지 않다. ‘하얀거탑’의 장준혁(김명민)이 욕망의 화신처럼 그려진 것은 그가 유난히 탐욕스러운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병원이 철저한 계급사회이기 때문이다.

직장도 마찬가지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윤진아(손예진)는 “윤탬버린”으로 불릴 만큼 회사에 최적화된 인물이었지만, 성희롱은 공기처럼 존재하고 그걸 문제 삼는 순간 예민한 사람이 된다. ‘졸업’에서 학원강사인 서혜진(정려원)은 자녀를 명문대에 보내려는 학부모들에게 추앙받는 한편, 학교에서 기생충이라는 말을 듣고도 곧바로 강의실에 들어가 웃어야 하는 고단한 직장인일 뿐이다.

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스틸컷. 공식 누리집 갈무리

그 견고한 세계를 만든 것도, 균열을 낼 수 있는 주체도 인간임을 안판석 감독은 매번 성실하게 납득시켰다. 그 중심에는 늘 그 세계에 온전하게 속하지 못하고 겉돌던 여성들이 있었다. ‘아줌마’의 오삼숙, ‘아내의 자격’의 윤서래(김희애), ‘밀회’의 오혜원(김희애), ‘풍문으로 들었소’의 서봄,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윤진아, ‘봄밤’의 이정인(한지민), ‘졸업’의 서혜진. 처한 환경은 저마다 다르지만, 이들은 자신이 속한 세계와 갈등하다가 끝내 그 세계를 벗어난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안판석 감독이 보여준 여성들이 불편했다. 그들은 지나치게 소극적이었다. 부당한 줄 알면서 견디고, 떠나야 하는 줄 알면서 머물렀다. 거침없이 아버지의 집을 떠나거나 일도 사랑도 제대로 해내는 유능한 여성들에 익숙해진 눈으로 보면 아직도 ‘아버지의 집’에서 나오지 못한 수동적 인물들처럼 보이기도 했다. 자신을 “우아한 노비”라고 부르는 오혜원, 연애 사실을 들키자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는 윤진아, 불행한 결혼 생활에 붙들려 있거나 아버지를 미워하면서도 그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는 ‘봄밤’의 자매들이 그랬다. 게다가 그의 멜로 속 여성들은 대개 자신을 붙들고 있는 세계의 문제를 알면서도 오래 머물다가 남성과의 사랑을 통해서야 비로소 그 세계와 본격적으로 갈등한다는 점도 시대착오적으로 여겨졌다.

JTBC ‘협상의 기술’ 스틸컷. 공식 누리집 갈무리

그러나 이제는 그 느린 변화와 탈출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안판석 감독의 여성들이 오래 망설인 것은, 현실에서 사람이 자신을 붙들고 있는 세계를 벗어나는 일이 그만큼 지난하고 어려운 과정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을 단숨에 해방하면 그들을 가두었던 세계가 얼마나 집요하고 두꺼웠는지 보이지 않는다. 망설임의 길이가 곧 그 세계의 두께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보여준 것은 원래 강했던 여성이 더 단단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속한 세계의 질서를 알면서도 그 안에 머물던 사람이 마침내 바깥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다. 그 결심을 밀어붙이는 계기가 대개 사랑이었을 뿐, 사랑 자체가 목표는 아닌 것이다. 안판석표 멜로의 차별성은 여기에 있다.

안판석 감독의 드라마에는 여성들이 어딘가를 넘어가는 장면이 자주 등장했다. 오혜원은 어둡고 비좁은 통로를 지나 이선재(유아인)를 만난다. 윤진아는 위험한 뒷길과 철조망을 넘어 서준희(정해인)에게 간다. 이정인은 처음에는 길 건너편에 선 유지호에게 차마 건너가지 못한 채 말한다. “건너오지 말아요. 그럼 안 될 것 같아.” 그러던 그가 마침내 길을 건넌다. “이번에도 건너오지 말아요. 내가 갈게.”

선을 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만 한번 넘어선 그들은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 오삼숙은 위선적인 지식인 남편 장진구(강석우)와 이혼한 뒤 성공한 사업가가 되고, 윤서래는 대치동을 떠난다. 오혜원은 자신의 비리를 자백하고 감옥으로 가며, 서봄은 남편인 한인상(이준), 집사와 가정부들과 함께 그 집을 나와 새로운 공동체를 만든다.

또한 그는 유난히 롱테이크를 자주 썼다. 윤서래가 멀리서 오는 연인 김태오(이성재)를 바라볼 때, 윤진아의 직장 회식 풍경이나, 서혜진의 고단한 일상을 보여줄 때 그는 어떤 판단도 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마치 그 지난한 시간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한 인간을 알 수 있다는 듯. 인간을 섣불리 심판하지 않고 신중하게 응시하며 이해하려 애쓰는 것. 문학이 오래도록 인간세계를 보여준 방식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문학에 가까웠다.

“모든 인간에게는 순정이 있기 때문에 ‘내가 잘못 사는 게 아닐까? 나도 좀 나아지고 싶은데 어떡하지?’ 같은 죄책감, 쓸쓸함, 허무함을 혼자 껴안고 살아요. 그러면서도 그걸 누군가와 민망하지 않게 교묘히 탐구하는 시간을 갖고 싶어 하죠. 어떤 사람에겐 그게 소설이고, 누군가에겐 영화고, 또 많은 사람에겐 드라마인 거예요. 중요한 건 드라마를 통해 답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인간을 의문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거죠.”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한 이 말대로 드라마를 만들었다.

ENA ‘연애박사’ 포스터. 공식 누리집 갈무리

세월 지나도 낡아지지 않는 빛나는 궤적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늘 끼고 다니며 드라마를 만들던 사람. “모든 예술은 휴머니즘을 위해 존재하는 건데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인권이나 일상의 행복이 무시되면 안 된다”며 배우와 스태프에게 “철저하게 쉴 시간을 주고, 잘 시간을 주고, 씻을 시간을 주고, 노닥거릴 시간”을 준 것을 가장 자랑스러워하던 사람. 그가 보여준 세계는 언제나 당대의 문제를 담고 있었고, 그의 드라마에는 인간다움과 생활감이 살아 있었다. 인간을 둘러싼 세계를 끝까지 들여다보면서도 쉽게 냉소하지 않았기에 그의 드라마는 어려운 이야기를 하면서도 관념적이지 않았고, 세월이 지나도 낡아지지 않는다. 그는 오랫동안 나의 자랑이었다.

오수경 자유기고가·‘드라마의 말들’ 저자

출처: 한겨레21 https://n.news.naver.com/article/036/0000054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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