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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닫히지 않는 베이비박스 17년의 기록] 청소년이 된 아이들

[닫히지 않는 베이비박스 17년의 기록] 청소년이 된 아이들
게티이미지뱅크 AI생성이미지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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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 부모를 묻지 않는 아이들… 마음은 상처로 흔들렸다

아침이 시작되자 위아래로 맞춰 입은 듯한 잠옷 차림의 초등학생 아이들이 눈을 비비며 주방으로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아이들은 모두 종이봉투에 담긴 알약을 받아갔다. 익숙한 듯 차례로 물과 함께 약을 삼킨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식탁에 앉아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메뉴는 흰 쌀밥에 계란후라이와 장조림, 사과. 아이들은 앳된 얼굴의 사회복지사 민우(가명·27)씨를 ‘아빠’라고 불렀다.

민우씨는 “아이들의 마음 건강에 도움을 주는 약”이라고 설명했다. A시설의 아이들 40명 대부분은 이렇게 아침마다 약을 먹고 있다. 대부분 항우울제, 항불안제 같은 진정용 약제다.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경계선 지능도 아이들이 약을 먹는 이유 중 하나다. 민우씨는 아이들이 정서적 안정을 찾기 위해 약을 먹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봤다. 그는 “가정에서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자라야 할 아이들이 남들과 집단생활부터 배우게 되니 정서적 불안정은 어떻게 보면 필연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아침식사가 끝나자 쭈뼛쭈뼛하던 아이들이 다가와 “안녕하세요”라며 인사를 건넸다. 9세인 초등학교 3학년 영준(가명)이는 “아저씨, 오늘 집에 언제 가요?”라고 물었다. 이 시설의 ‘왕엄마’로 불리는 시설장 예진(가명)씨는 “사회복지사 대부분이 여성이고,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자원봉사자들도 일시적인 만남이 지속되다 보니 성인 남성에게 아버지에게 느낄 법한 그리움을 갖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영준이를 포함한 이 방의 아이 3명은 부모와의 연이 끊어진 베이비박스 출신 아이들이다. 따로 약속한 적은 없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방 아이들은 부모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국민일보는 베이비박스 출신 아이들의 성장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8월 12일부터 지난 1일까지 서울 및 수도권 아동보호센터 6곳을 방문했다. 아이들은 저마다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었다. 예진씨는 “원가정과의 연이 끊어지지 않고 주기적으로 부모와 연락하는 다른 아이들을 보며, 이르든 늦든 베이비박스 아이들은 ‘나는 다른 친구들과 뭔가 다르다’는 걸 깨닫는다”고 설명했다.

아이들은 자신의 출생을 묻고선 아파한다

보통 아이들은 주변 상황을 인식할 만한 나이가 되면 자신의 출생에 대해 묻는다고 한다. “우리 진짜 엄마는 어딨어요?”라는 질문이 빠짐없이 나온다는 얘기다. 이 시설에서는 남녀 사회복지사를 각각 아빠, 엄마라고 부른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진짜 엄마’를 찾는 아이들이 생긴다는 것이다. 예진씨는 “베이비박스 출신이든 아니든 모두 우리가 가슴으로 키우는 아이들”이라며 아이들에게 출생 관련된 이야기를 굳이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도 아이들은 알 걸 다 알아요. 베이비박스라는 말을 굳이 구체적으로 해주지는 않지만, 엄마가 사정상 너를 키우지 못한다고 말해주거든요. 그 다음부터는 다시 물어보지 않더라고요.” 예진씨가 안쓰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경기도 B시설의 재원생 36명 중 35명도 비슷한 약을 먹고 있었다. 이 시설의 절반은 베이비박스 출신 아이들이다. 아이들의 정서적 증상은 A시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ADHD, 경계선 지능, 조울증.

이 시설에는 아이들의 정서적 문제를 보듬어주기 위한 노력이 곳곳에서 엿보였다. 식당에도, 침실에도, 교실에도 ‘릴렉스룸’이라는 조그마한 방이 구석구석 설치돼 있었다. 분노나 슬픔을 주체할 수 없어 감정이 북받치면 룸에 들어가 마음을 추스르고 나온다. 알록달록한 벽지로 꾸며진 룸 한가운데는 푹신한 솜 의자가 놓여 있었다. 시설 관계자는 “벽도, 바닥도 전부 푹신하고 부드러운 소재”라고 설명했다.

현장에서는 정서적 문제를 겪는 베이비박스 출신 아이들을 걱정하는 사회복지사들의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아이들이 보이는 정서적 어려움은 다양한 패턴으로 나타난다. 사회복지사들은 “아이들이 부모에게 버려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종종 평정심이 흔들릴 때도 있다”고 말했다.

이 시설에 ‘트라우마 기반 상담’을 도입하도록 권고·자문했던 보건복지부 산하 국가트라우마센터의 곽의현 박사는 인터뷰에서 “물리적으로 기억하기 어려운 어린 나이일지라도 베이비박스에 보내졌다는 트라우마가 아이들의 정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아동 개개인별로 마음 속 트라우마를 최대한 건드리지 않거나, 적절하게 해소하도록 돕는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보호아동이 겪는 정서적 문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해소해주기 위해 서울시는 지난해 8월 ‘서울힐링센터’를 열었다. 일반 보호시설에서 대응하기 어려운 심리·정서 문제를 가진 아이들은 이 센터에 입소해 최대 1년간 생활하며 집중적인 치료를 받는다.

아침식사가 끝난 A시설에서의 오전 7시30분, 민우씨의 입은 몸만큼이나 분주했다. 남자아이 7명이 먹은 그릇이 차례로 싱크대로 향했다. 한 아이가 식사만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자 곧바로 포착한 민우씨는 “양치하고 들어가야지”라고 외쳤다. “아빠, 양말이 없어요”, “아 오늘 숙제 챙겨가야 하는데”. 10세 전후의 아이들에게서 쉴 새 없이 조잘거리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거기 소파에서 잘 찾아봐”, “잊기 전에 가방에 잘 챙겨”. 정신없는 와중에도 민우씨는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일일이 대답했다. 현관 앞에는 책 무더기 일곱 개가, 쇼파에는 옷 무더기 7개가 쌓였다. 아이들은 각자 자신의 몫을 찾아다녔다.

오전 8시30분. 아이들이 다 등교하자 민우씨는 그제야 의자에 털썩 앉았다. “전날 밤 7시부터 다음 날 아이들이 등교할 때까지, 이렇게 일하면서 아이들을 돌보는 거예요. 솔직히 쉽진 않죠.”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민우씨 같은 사회복지사들은 “동료들이 고갈되고 있다”는 호소를 공통적으로 내놨다.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보호시설 특성상 대부분 시설의 근무자들은 24시간 교대 근무를 하고 있다. 12시간 일하고, 귀가했다 출근해서 다시 12시간 근무. 그리고 하루 휴무. 이런 3교대 근무가 끊임없이 돌아간다. 동료 복지사가 연차라도 쓰는 날에는 연속 근무하는 날도 다반사다. “다음 달에 3박4일간 지방 출장을 가야 해서 자리를 비우거든요. 다른 선생님들이 버텨주실 수 있을지…” 민우씨가 말끝을 흐렸다.

사회복지사가 떠나면 시설은 또 다른 사회복지사를 채용해 그 자리를 채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들은 시설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 가장 믿을 수 있는 주 양육자(보호자)이기 때문이다. 사회복지사가 사라지는 건 곧 부모가 사라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이들 입장에서, 자신이 ‘엄마 아빠’라고 부르던 사회복지사는 한 번 떠나면 사실상 두 번 다시 볼 수 없게 된다. 이런 경험이 누적되며 아이들은 ‘부모를 잃는 경험’을 반복적으로 하게 된다.

“아이들은 주기적으로 엄마가 죽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 불안한 경험을 심하면 10번씩이나 하면서 성인으로 자라나는데, 정서안정 약을 먹지 않고는 배겨 내기 어렵죠.“ 20년차 사회복지사 C씨가 전한 보호시설 인력난의 현주소다. 그는 “아이들은 환경의 변화에 매우 민감해한다”며 “베이비박스 출신이라 부모가 없다는 특성상 이 아이들은 태생적으로 불안감을 느낀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은 자신이 가장 믿고 따르던 보호자가 계속해서 바뀌는 상황에 노출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음의 상처가 있는 아이들에게 힘이 되는 건 결국 사랑이다. 국민일보가 만난 아동보호시설의 사회복지사들은 하나같이 힘겨운 환경에서도 ‘엄마 아빠’ 혹은 ‘이모 삼촌’을 자처하며 아이들 곁을 지켰다. A시설에선 오전부터 피곤한 얼굴로 시설의 상황을 설명하던 ‘큰 언니’ 수지(가명)씨가 “아이들 등교시간”이라며 회의실을 급하게 뛰쳐나갔다. 삑삑 소리가 나는 신발을 신고 어린이집 차량에 탑승하는 아이들을 향해 수지씨는 “언니가 사랑하는 거 알지? 자 뽀뽀”라며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수지씨는 “누가 뭐래도 아이들에게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예정보다 이른 시간인 오후 9시에 귀가하겠다며 짐을 챙기자 영준이가 “10시까지 있는다면서요. 왜 벌써 가요”라며 한껏 아쉬워했다. “또 와요”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 아이는 “제가 제일 아끼는 거예요”라며 포켓몬 카드 두 장을 건네줬다.

출처: 국민일보 https://n.news.naver.com/article/005/0001878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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