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임신중지약' 미프진 도입 앞둔 한국… 日 '1%대' 이용률이 경고하는 것 [젠더살롱]

한국일보 기자들이 직접 여러 사회 문제와 주변의 이야기를 젠더적 관점에서 풀어냅니다. '젠더, 공간, 권력' 등을 쓴 안숙영 계명대 여성학과 교수의 글도 기고로 함께 합니다.
한 여성단체 활동가가 지난달 30일 폴란드 바르샤바에 설치된 임신중지약 보관함 'AbortOmat'에서 약물이 든 봉투를 꺼내고 있다. 22개의 칸으로 구성된 보관함은 여성들이 6자리 코드를 입력하면 익명으로 신속하게 임신중지약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속옷, 화장품도 온라인에서 주문하면 다음 날 받아볼 수 있는 세상인데 더 급한 임신중지약은 그럴 수 없다는 문제의식으로 설치됐다. 유럽에서 가장 엄격한 임신중지 규제를 시행 중인 자국 현실에 항의하는 취지다. 바르샤바=AFP 연합뉴스
정부가 지난달 16일, 이르면 내년 초부터 임신중지 약물인 '미프진'을 도입하겠다고 공식화했습니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7년 만입니다. 여성계가 오랫동안 요구해 온 유산유도제 도입이 현실화됐지만, 여성단체 안팎에서는 어째서인지 환영보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큰 상황입니다.
지난달 28일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위한 국제 행동의 날'을 맞아 광화문 광장 인근에서 여성단체 주최로 열린 행사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잇따랐습니다. 주로 낮은 약물 접근성에 대한 지적이 나왔는데요. 자신을 산부인과 전문의라고 밝힌 한 참가자는 발언 시간에 "자기결정권은 선언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며 "선택할 수 있는 의료적·경제적·사회적 조건이 함께 보장될 때 비로소 현실의 권리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정부가 검토 중인 미프진 사용 가이드라인의 문턱이 지나치게 높다는 겁니다.
지난달 28일 서울 중구 파이낸스빌딩 앞에서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위한 국제 행동의 날'을 맞아 열린 여성단체의 행사. '미프진 도입 101번째 국가를 향해'라는 주제로 열렸다. 뉴시스
정부는 미프진 도입 직후 2년간은 의사의 직접 처방, 의료기관 내 조제를 원칙으로 한다고 밝혔습니다. 우선 병원에 방문해 초음파 검사 등으로 상태를 확인하고 의사에게 약을 처방받아 복용한 뒤, 1~2주 이내에 병원을 방문해 약물 효과를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도록 한다는 방침입니다. 또 출혈 등 긴급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약물 복용 후 일정 시간 동안 환자가 의료기관에 대기하며 의사가 관찰하는 방식 등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미프진은 두 종류 성분으로 구성된 약물로, 미페프리스톤 복용 후 24~48시간 내 미소프로스톨을 차례로 복용하도록 돼 있습니다. 한성숙 국무총리는 앞서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부작용 등 미프진 위험성에 대한 질문에 "병원에서 진행하고 원내에서만 가능하도록 설계하고 있다"며 "단계별로 의사가 관찰하고 이후에도 의사가 볼 수 있는 아주 보수적인 단계로 설계하고 있다"고 설명했죠.
여성단체가 문제 삼는 점이 이 지점입니다. 안전성을 고려해 의료기관과 복용 방법을 제한하다 보면 그만큼 의료 현장 이용률은 떨어진다는 겁니다. 당장 직장인이나 청소년에겐 병원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면 부담이 될 수 있죠. 일부 지역에서는 산부인과 자체를 찾기 어려울 수도 있고요. 전국 250개 시군구 가운데 분만 의료기관이 한 곳도 없는 지역은 30.8%(77곳·2024년)에 달합니다.
서은솔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의약품정책부장(약사)은 지난달 17일 열린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의 긴급 기자간담회에서 "약물적 임신중지의 장점은 수술적 처치와 마취 없이 임신중지를 할 수 있고, 자택 복용과 자가관리도 가능하다는 것"이라며 "해외에서 이미 오랜 기간 안전성과 유효성 측면에서 임상 데이터를 쌓은 만큼 자신의 상황에 맞는 장소와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폴란드 여성단체가 최근 임신중지 약물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자며 약물을 익명으로 신속하게 받을 수 있는 무인 보관함을 세계 최초로 설치하기도 했죠.
'매사추세츠 약물 임신중지 접근 프로젝트' 담당자가 미국 매사추세츠주 서머빌 사무실에서 지난해 5월 이용자에게 발송할 약물과 돌봄 키트를 보여주고 있다. 서머빌=AP 연합뉴스
정부 구상대로라면 우리보다 앞서 임신중지 약물을 도입한 일본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됩니다. 일본은 2023년 4월 임신중절 약물 '메피고팩'을 허가했습니다. 약국 조제를 허용하지 않았고 법으로 지정된 의사와 의료기관 중심으로만 사용하도록 했죠. 특히 도입 초기에는 미소프로스톨을 투여한 뒤 태낭이 배출될 때까지 입원하거나 의료기관 안에서 대기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도입 첫해 5~10월 경구약을 이용한 사례는 435건으로 전체 임신중지(3만6,007건)의 약 1.2%, 9주 이전 임신중지의 1.5%에 불과했습니다. 미국의 임신중지 가운데 57.6%(질병통제예방센터·2022년)가 약물적 방법으로 이뤄지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이어지자 일본은 2024년 11월부터 자택에서 경과를 관찰할 수 있도록 규정을 완화했습니다. 하지만 의료기관 반경 16㎞ 이내에 거주해야 하는 등 여전히 이용엔 여러 제약이 따릅니다.
여성들이 지난달 28일 칠레 산티아고에서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위한 국제 행동의 날'을 기념하는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산티아고=로이터 연합뉴스
건강보험 적용 여부도 중요한 쟁점입니다. 비용이 접근성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현재 "비급여를 예상한다"고 밝힌 상태입니다. 오정원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여성위원회 부위원장(산부인과 전문의)은 "약값이 비급여가 되면 검사나 합병증 치료 등 임신중지와 관련된 처치가 전반적으로 비급여로 남을 가능성이 커진다"며 "여성의 향후 가임력과 장기적인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만큼 건강보험을 통한 보장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청소년에게 약물을 처방할 때 보호자 동의를 요구할지 여부도 사회적 합의가 필요합니다. 성인에 비해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청소년일수록 신속하고 안전한 임신중지에 대한 접근성을 높여야 하는데, 동의를 의무화하면 임신중지가 계속해서 음성화될 수 있다는 우려입니다.
김주희 널싱페미 활동가(간호사)는 "10대의 경우 지금도 임신중지 시술을 받기 위해 온라인에서 동행자를 구하는 사례가 많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약물과 수술 모두 건강보험을 적용하고 표준 진료 가이드라인을 확립해 청소년은 물론 누구나 경제적 장벽 없이 안전한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나아가 임신중지를 비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보건의료 권리로 인정하고, 공공의료 체계 안에 포함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