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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사교육 못시킨 부모, 죄인 되잖나” 블라인드 채용 운동 나선 89세 노학자 [이경원의 질문]

“사교육 못시킨 부모, 죄인 되잖나” 블라인드 채용 운동 나선 89세 노학자 [이경원의 질문]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가 5일 경기도 광주 한 카페에서 본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경기 광주=김지훈 기자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가 5일 경기도 광주 한 카페에서 본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경기 광주=김지훈 기자

“학력 차별, 옳지도 실용적이지도 않다”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가 5일 경기도 광주 한 카페에서 본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경기 광주=김지훈 기자

“왜 강남 3구에서 그렇게 유독 서울대에 많이 들어옵니까. 그곳에만 천재들이 모였다고 보장할 수는 없잖아요. 이것은 사교육 때문이고, 약자의 피해를 부르는 것으로서 공정하지 않습니다.”

손봉호(89) 서울대 명예교수는 5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사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승승장구하고 취업 때에도 혜택을 받도록 만든다면, 사교육을 시킬 수 없는 부모는 자식에게 엄청난 죄를 짓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오늘날 학생의 ‘좋은 대학’ 진학은 부모의 재력을 빼고서는 모두 설명되지 않으며, 영어유치원과 서울 대치동 선망의 기저에는 ‘좋은 대학’이 ‘좋은 직장’까지 이어진다는 믿음이 있다. 이러한 한국사회의 풍경은 손 교수가 볼 때 “강(强)은 더욱 강해지고 약(弱)은 더욱 약해지는 모습”으로 불공정하다.

과열된 입시 경쟁과 끝없는 사교육은 은퇴한 노학자를 재차 시민운동의 세계로 불러냈다. 그는 ‘교육의 봄’ 이사장으로서 국회의원들을 만나며 ‘채용 시 출신학교 차별 금지’ 법제화 운동을 벌이고 있다. 기업이 채용할 때 구직자에게 출신학교 정보를 기재하도록 요구하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다. 손 교수는 “우리나라는 정도에 지나칠 정도, 즉 정의에 어긋날 정도로 학력을 과대평가한다”며 “적어도 직원이 300인 이상인 기업, 전문적 연구와 관계 없는 기업은 ‘블라인드 채용’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성경이 말하는 정의(正義)는 ‘고아와 과부,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을 돌보라’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의 교육은 지금 약자를 보호하기보다 더욱 약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며 “형편이 안 되는 부모는 억울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도덕적 구호로서만이 아니라 진정한 인재 선발이라는 실용적 관점에서도 기업의 ‘블라인드 채용’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청소년기에 얻는 대학 간판이 일생을 좌우하는 현실은 올바르지 못할뿐더러 대입에 중요했던 정답 맞히기식 암기 위주 지식이 인공지능(AI) 시대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와의 인터뷰는 자택 인근인 경기도 광주시의 한 카페에서 이뤄졌다. 처음엔 단풍이 보이는 야외 테라스 자리에서 마주했으나 기온이 쌀쌀해 안으로 옮겨야 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다가왔다”는 기자의 말에, 노교수는 “학생들을 보면 불쌍하다”고 답했다. 손 교수는 “유치원부터 고교 3학년까지의 모든 교육이 대학 입학을 위해 이뤄지고 있고, 수능 하나에 모든 것이 결판나고 있다”고 말했다.

여러 평가 중 그나마 가장 믿을 만한 것이 수능이며 ‘한 줄 세우기’가 오히려 공정하다는 여론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인공지능(AI) 기술혁명 시대임을 고려하면 정답 맞히기식 입시의 한계는 뚜렷하며, 에세이와 논술 비중을 높여야 한다고 손 교수는 주장했다. 손 교수는 “학부모가 수능을 믿는 이유는 컴퓨터가 채점을 하기 때문”이라며 “하지만 컴퓨터가 채점할 수 있도록 정답이 정해진 것, 외워서 답을 고르는 일에 지금 과연 큰 의미가 있느냐”고 되물었다. 손 교수는 “사람과 관계된 것, 사회와 관계된 것은 절대적인 정답이 없지 않더냐”고 반문했다.

평생 철학하고 교육한 그가 볼 때 한국의 입시는 그 과정 자체로 청소년들에게 잘못된 메시지를 주고 있다. 남을 돕기보다 오직 내가 남을 딛고 잘사는 데 초점이 맞춰진다는 것이다. 손 교수는 “잘못은 우리 기성세대가 지었고 벌은 우리 아이들이 받는다”며 “나는 이것이 범죄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기성세대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다는 뜻이냐고 묻자, 손 교수는 “그런 시험을 칠 수밖에 없도록, 믿지 못하는 사회를 만든 것”이라고 답했다.

한국 10대 청소년의 자살은 무섭게 증가해 지난해 하루 1명꼴을 넘어섰다. 상당수는 학업 스트레스가 원인으로 분석됐다. 손 교수는 “프랑스 ‘르몽드’가 한국 중

고교생을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 그런데 가장 불행한 학생들’이라고 칭했는데 나도 동의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 나이에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은 지나친 부담”이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정마다 불태운 교육열이 한국사회의 동력이 됐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과연 ‘좋은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진정한 인재가 되는지 패러다임 자체를 돌아볼 시점이라는 게 손 교수 생각이다. 손 교수는 “사교육을 받아서 합격한 실력이 진정한 실력인지, 좋은 대학 나오면 실제 훌륭한지도 의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단순한 지식은 AI가 다 제공해주지 않느냐”며 “지금의 성적이란 것으로는 인간성과 일에의 적극성, 다른 사람과의 협력 능력을 알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그의 대안은 결국 ‘깊이 생각해야 하는’ 에세이와 논술의 비중을 확대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아주 큰 신문사 사장에게 ‘서울대 출신 기자들이 기사를 더 잘 씁디까?’ 물어본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모르겠다, 그런 건 눈에 띄지 않더라’고 하는 겁니다. 한 대기업이 사원들을 조사해 보니 첫 3년간은 소위 일류대 출신들이 좀 낫더래요. 하지만 3년이 지나면, 아무 차이가 없다고 합니다.”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가 5일 경기도 광주 한 카페에서 본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경기 광주=김지훈 기자

손 교수는 “미국 구글의 경우 ‘이 사람이 다른 직원으로 하여금 그 역량을 발휘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느냐’를 채용의 기준으로 둔다”고 말했다. 그는 “오히려 다른 사람과 함께 행복한 것이 결과적으로 내게 더 큰 행복을 준다”고 강조했다. 그의 자서전인 ‘산을 등에 지고 가려 했네’ 서문에는 “영국 소설가 조지 엘리엇의 ‘서로의 삶을 좀 덜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가 제가 생각하는 삶의 의미”라는 말이 적혀 있다.

시험 답안을 잘 고르도록 하는 것이 교육이 아니며, ‘줄 세우기’보다 높은 차원의 공정도 있다. 손 교수는 1970년대 총신대 기독교철학 강사로 일할 때부터 2010년 고신대 석좌교수를 마칠 때까지 모든 시험을 ‘무감독’으로 진행했다. “여러분, 양심과 정직이 중요합니다. 답안지는 교탁에 올려 두십시오.” 그는 “저희를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적혔던 한 학생의 답안지를 잊지 못한다. 손 교수는 “학점이 좀 높은 것이 과연 얼마나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겠느냐. 그보다는 다른 사람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학력 차별 철폐 주장은 20대 때부터 계속한 정직과 투명성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는 서울대 영문학과 학생이던 1960년 4·19 혁명 때 거리에 있었다. 커피와 양담배 밀수에 쓰이는 돈이 대전시 인구의 1년치 식량 구매 비용과 같다는 것을 안 뒤 ‘새생활운동’을 조직했다. 군용 지프차를 빼돌려 타는 국회의원들을 보면 그 앞에 드러누워 차량을 붙잡았고, 서울시청 뒷마당에 모아 불태우려 시도했다. 손 교수는 “상당히 래디컬(급진적)하게 했지요” 하며 미소를 짓는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거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1973년 귀국, 장애인권익운동을 시작했다. ‘밀알’을 조직하고 자택에 경사로를 만들었다. 1987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 1989년 경제정의실천시민운동 창립을 주도했다. 1993년 김영삼정부에서는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됐다. 당시 위원들은 ‘주식’을 예외로 하려 했는데, 손 교수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식을 넣지 않는 건 말도 안 된다”고 밀어붙여 공개하게 됐다. 배석한 실무자 국장이 다가와 “교수님 말씀이 맞습니다”라고 속삭였다.

공직자 재산공개는 30여년 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기업이 출신학교 정보 없이 사람을 채용하는 것도 언젠가 자연스러워질 것이라고, 손 교수는 믿는다. 손 교수는 “강자가 약자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고치는 게 내가 해온 여러 운동 밑에 깔린 원칙”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약자는 장애인이었고, 굶주리는 이들이었고, 잘못된 선거 제도와 환경 파괴에 고통받는 시민들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약자는 사교육할 형편이 안 되는 가정이다.

-본인도 서울대 출신이면서 학력 차별 철폐를 이야기한다. 모순 아닌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려 애쓰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게 아니다. 억지로 막대한 돈을 들여 사교육을 시키는 것이 문제다. 그런 사교육을 받아 합격했다면, 그 실력이 정말 자신의 실력인지 의문이다.”

-기업 자율성을 침해한다는 지적이 예상된다.

“내 주장이 기업에 방해가 된다면 잘못일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전제 없이 심층면접으로 인재를 뽑는 것이 기업에 이익이 된다고 확신한다. 학력 차별을 하지 않는 대기업이 있는데 손해를 보지 않고 있다. 아이들에게 고통을 주면서 이익도 안 된다면 유지할 이유가 없다.”

-정책을 펼칠 공직 기회도 있지 않았나(손 교수는 김대중정부에서 국무총리 제안을 받았었다. 국회의원 공천 약속을 하는 이도 있었다. 손 교수는 모두 거절했다).

“그런 공직을 맡으면 타협을 안 할 수가 없다. 현실에 타협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내 자신이 뭐랄까 서글플 것 같았다.”

-수능을 앞둔 수험생들에게 하고픈 말이 있는가.

“내가 왜 이렇게 애쓰고 힘들게 공부했는지 한번 따져 보면 좋겠다. ‘다른 사람에게 플러스가 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훨씬 느긋해질 것이다.”

‘블라인드 채용’과 관련해서는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회의 더불어민주당 강득구 의원과 박홍근 의원이 ‘채용절차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지난해 각각 발의했다. 이후 현장 수용성을 고려한 의견수렴도 이뤄졌다. 출신학교를 무조건 고려하지 못하게 하는 것보다는 전문 기술이 필요한 분야 등에서 예외적 적용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손 교수와 송인수 ‘교육의봄’ 대표는 지난달 기후노동위 고용노동법안심사소위 위원장인 국민의힘 김형동 의원을 만났다. 손 교수는 “김 의원이 적극적”이라며 기대감을 표했다. 김 의원은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공정한 사회 진입을 돕는 것이 국회의 책무”라며 “우선순위에 놓고 제때 입법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손 교수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그는 “내년에 90세인데 새로운 꿈을 꿀 수는 없다”고 답했다. 그는 “지금 맡은 일들을 잘 감당하고, 다른 사람들이 일을 잘할 수 있도록 도우려 한다”고 말했다.

“‘내가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것은 본능일 뿐이다. 단순히 본능대로 살려 한다면 거기에 의미라는 말을 붙일 수가 없다. 거기에 무슨 의미가, 그리고 무슨 가치가 있겠나.”

출처: 국민일보 https://n.news.naver.com/article/005/0001883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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