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페미니스트 정치인들이 꼽은 ‘위기’와 ‘기회’

[장혜영에게 정치를 묻다] 콜메나 펀드의 〈아시아 컨비닝〉에 다녀와서
콜메나 펀드와 주 태국 영국대사관이 공동 주최한 〈디지털 시대의 젠더와 정치〉 행사에 패널로 참여한 정치 리더들. 앉은 순서대로 사회자, 장혜영, 파에즈라 리잘만(말레이시아), 제랄딘 로만(필리핀), 수간다 싱 파르마(인도) *출처-콜메나 펀드(Colmena Fund)
21대 국회의원으로서 임기를 마친 지 이제 2년하고도 3개월이 넘어갑니다. 그간 원외 정치인으로서 여러 정치활동을 해왔습니다. 서울시 마포구 지역의 지역위원장으로서 지역의 사안들에 개입하고, 언론사의 칼럼니스트이자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의 패널로 활동하며, 더 나은 민주주의를 모색하는 비영리단체를 운영하는 등의 일입니다. 오늘은 제가 하고 있는 또다른 중요한 일을 소개해드리려 합니다. 바로 전세계의 페미니스트 정치인들과 교류하며 연대를 구축해나가는 일입니다.
권위주의 정치에 맞선 최전선에 있는 여성 리더들
지금 전세계에서 민주주의는 권위주의 정치의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미국과 프랑스 등 대표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여겨지던 나라의 정부는 공권력을 통해 자국민의 생명과 권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러-우 전쟁과 이란 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의 학살은 방치되어 있습니다. 중남미와 동유럽의 여러 국가들에는 권위주의 정부가 속속 들어서고 있습니다.
아시아로 눈을 돌려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은 윤석열의 12·3 내란을 지혜롭게 막아냈지만, 새 정부 출범 이후에도 제1야당은 여전히 불법 계엄과 내란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대만해협의 긴장감은 날로 고조됩니다. 일본 최초의 여성 총리는 평화헌법 9조를 없애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미얀마 군부는 민간정부로 이양을 표방했지만 여전히 자국민을 학살합니다. 필리핀에서는 정치 권력 가문의 세습이 공고화되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정치, 사회, 경제 영역 내에서 군부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움직임 속에 인권활동가에 대한 테러가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권위주의 세력이 민주주의를 무너뜨릴 때 가장 먼저 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여성의 권리와 여성정치를 공격하는 일입니다. 약한 고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성의 권리를 무너뜨릴 수 있다면 모두의 권리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권위주의자들은 여성의 평등한 권리를 부정하고, 성별 이분법과 가부장제에 종속된 존재로서 여성을 통제하고 비하합니다. 이에 맞서 싸우거나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노력하는 여성 정치 리더들을 온갖 이유로 비난하고 공격합니다.
아시아의 여성들, 그리고 민주주의와 성평등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맨 앞에서 싸우는 여성들은 크나큰 위협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반면, 이러한 위협으로부터 여성 정치 지도자들을 지원하고 연대하기 위한 노력도 엄연히 존재합니다. 권위주의 정치에 맞서 자국의 시민들을 보호하고 민주적 정치의 가능성을 확장하기 위해 애쓰는 여성 정치인들을 연결해,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고 함께 연대하며 대안을 모색하는 장을 만들고자 다양한 국제기구들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리 중 하나가 최근 태국 방콕에서 열린 콜메나 펀드(Colmena Fund) 주최의 ‘아시아 컨비닝(Asia Convening)’입니다. 저는 한국의 전직 국회의원이자 페미니스트 정치학교를 운영하는 비영리단체 망원정x의 대표로서 이 자리에 초대받았습니다.
콜메나 펀드(Colmena Fund)가 주최한 아시아 여성 정치 리더들의 회합 ‘She Leads Asia’ 아시아 컨비닝 행사장. (출처-콜메나 펀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아시아의 페미니스트 정치인들
콜메나 펀드는 페미니스트 및 민주적 여성 정치 리더십을 진전시키기 위해 설립된 초당파적 국제 기금입니다. 아프리카, 아시아, 중남미, 중동 전역 등 주로 남반구를 중심으로 다양한 여성들이 제도 정치 영역에 참여하고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합니다. ‘콜메나’란 스페인어로 벌집을 뜻하는데, 서로 협력하고 지원하며 포용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여성 정치 리더들의 네트워크를 상징합니다. 콜메나 펀드는 제가 운영하는 비영리단체 망원정x의 ‘페미니스트 정치학교’ 프로그램의 파트너이기도 합니다.
이번에 열린 ‘She Leads Asia’ 아시아 컨비닝은 저와 같이 아시아 각 지역에서 활동하는 20여 명의 여성 정치 리더들이 모여 서로의 상황을 공유하고 현재의 위기를 극복한 대안적 미래상을 그려보는 자리입니다. 참석자들의 국적과 활동은 다양한데, 그중 몇몇을 소개해봅니다.
태국의 42세 여성 정치인 쿤티다 릉루엥키앗은 2019년 군부 독재에 반대하며 약진한 미래전진당(Future Forward Party)의 부대표이자 하원의원입니다. 미래전진당은 이듬해 헌법재판소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했습니다. 쿤티다는 정당의 주요 지도자들과 함께 10년간 피선거권을 박탈당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의회 밖에서 시민들의 정치 참여 역량을 강화하는 단체 진보운동재단(Progressive Movement Foundation)을 만들어 활동하는 한편, 태국 의회의 정책 자문을 담당하며 태국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습니다.
말레이시아 다문화 청년당(MUDA) 부대표인 파에즈라 리잘만은 말레이시아 사바 주에서 투명한 거버넌스와 여성 및 청년의 정치 대표성 강화를 위해 앞장서는 여성 청년 정치인입니다. 파에즈라의 정당은 2020년 설립된 다인종 청년 중심의 정당입니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이자 테크 기업가이기도 한 그는 사는 곳에 관계 없이 모든 사람들이 디지털 기술을 통한 기회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 하에 기술 교육 접근성 확대 의제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청년의 정치 참여와 시민적 책임을 탐구하는 그의 저서 제목은 『우리가 아니면 누구인가』입니다.
8월 초 태국 방콕에서, 콜메나 펀드(Colmena Fund) 주최의 ‘She Leads Asia’ 아시아 컨비닝이 열렸다. 아시아의 여성 정치 지도자들이 모여 서로의 상황을 공유하고 대안적인 미래를 모색하는 자리다. (출처-콜메나 펀드)
필리핀의 제랄딘 로만 전 하원의원은 필리핀 의회 역사상 최초의 트랜스젠더 여성 하원의원으로 2016년 필리핀 바탄 주 제1지역구에서 당선되어, 2025년까지 3연임에 성공한 인물입니다. 필리핀 헌법상 연속 4연임은 제한되기에 한 번의 공백기를 갖고 다시 출마를 준비하는 그는 의회에서 성평등과 차별금지법 추진, 포용적 보건의료 시스템 도입을 위해 애써왔습니다. 또한, 트랜스젠더의 가시화와 정치 참여 확대를 위해 아시아 전역과 글로벌 무대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내년이면 그는 60대를 맞이합니다.
네팔의 암리타 비카 하원의원은 비례대표제의 ‘달리트 쿼터’로 당선된 신임 하원의원입니다. 달리트란 힌두 카스트 제도의 최하층을 일컫는 말로, 정치, 경제, 사회, 종교적으로 오랫동안 배제되어온 사람들입니다. 귀금속 비즈니스를 운영하던 자영업자였던 그는 네팔의 Z세대 운동에 영감을 받아 정치에 뛰어들었습니다. 암리타 의원의 든든한 동지로 함께 참석한 Z세대 정치활동가 크리스피 자이스왈은 카트만두대학교 법대생이자 교차성 페미니스트 활동가로서, 네팔의 성과 재생산 권리 강화와 소외 계층의 정치 대표성 강화에 목소리를 내는 인물입니다.
이외에도 미얀마 친 족 출신의 여성으로 국민통합정부(NUG) 연방정부의 차관이자 소수민족 연구센터의 상임이사로 활동하는 그레이스 응, 파키스탄 주의회 의원이자 여성 의원 그룹의 리더로서 가정폭력 방지와 재가노동자 권익 향상, 트랜스젠더 보호를 위해 앞장서는 암나 사다르, 24세의 나이로 2025년 인도 델리 시의회 보궐선거에 최연소 후보로 출마한 이시나 굽타, 동티모르 인권운동(Timor-Leste Human Rights Movement)의 코디네이터이자 아시아 정의와 권리(Asia Justice and Rights)의 활동가로서 성평등, 환경 정의, 인권을 중심으로 청년 정치를 조직하는 한편, 분쟁 지역의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을 지원하는 30세의 아만디나 디 실바….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의 활동을 이으면 그 자체가 곧 아시아 민주주의와 성평등을 지키는 싸움의 최전선이 됩니다.
좌절 속에서도 대안을 모색하는 낙관주의로서의 페미니스트 정치
이 자리에서 우리가 공통적으로 확인한 위기와 기회가 있습니다. 갈수록 높아지는 아시아의 지정학적 위기, 규제되지 않는 AI의 확산, 허위 선동에 취약한 디지털 미디어 환경, 이를 이용해 더욱 심화되는 정치적 양극화와 성별에 기반한 폭력, 그리고 기후위기는 향후 50년간 우리 모두가 공통으로 마주할 위기입니다.
특히 기술을 매개로 한 젠더 기반 폭력은 페미니스트 여성 정치인들이 매순간 마주하는 극심한 문제입니다. 이 주제로, 저는 콜메나 펀드와 주 태국 영국대사관이 공동으로 주최한 공식 대담에 패널로 참여해 그간의 경험을 공유하고 대안을 모색했습니다. 테크 기업들에 대한 규제, 법적 안전장치 마련에 더해 제가 강조한 것은 우리가 속한 정당 조직의 지원입니다. 온라인 플랫폼을 중심으로 여성 정치인이 겪는 성별에 기반한 폭력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로 바라보고, 명시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다수의 참가자들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기회도 있습니다. 가장 큰 기회는 민주주의와 성평등을 위해 싸우는 여성들의 존재 그 자체입니다. 민주적 페미니스트 정치 리더들의 네트워크와 이에 기반한 연대, 이를 지원하는 국내외적 조직과 자원들은 복합 위기의 시대에 민주적 페미니스트 정치 리더들을 지키는 방파제입니다. 끊임없이 공정성을 위협받고 있다 해도, 기본적으로 유지되는 민주적 선거제도 역시 중요한 기회입니다. 성별 의무 할당과 같이 공동체의 다양성을 지지하는 제도적 장치와, 인도와 네팔 등 아시아에서 일어나는 청년 세대의 정치운동도 변화의 씨앗을 품은 중요한 기회입니다.
더 안전한 디지털 공간 조성을 위한 〈디지털 시대의 젠더와 정치〉 행사 중. 아시아의 여성을 비롯한 다양한 젠더의 정치 리더들이 겪는 기술 기반 젠더폭력 해결을 주제로 한 세션에서 발언하는 장혜영 전 국회의원. *출처-콜메나 펀드(Colmena Fund)
공통의 위기에는 함께 맞서고, 다양한 기회에는 서로를 지원할 수 있도록 상시적 교류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 이 자리에 모인 여성 리더들의 결론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선거에서의 당락만이 정치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당선되면 모든 것을 얻은 것이고, 낙선하면 모든 것을 잃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특정한 후보의 승리가 언제나 그 사회의 승리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시민들이 위임한 권력을 가지고 공공선을 위해 일하기는커녕 민주주의의 기반을 공격하는 정치가 득세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콜메나 펀드의 아시아 컨비닝 같은 자리에서 만난 동료들과 대화하며 제가 느끼는 것은 좋은 선거를 치르는 것 외에 모두를 위한 민주주의를 위해 우리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이 정말로 많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역에서 풀뿌리 정치학교를 만들어 운영하는 것이든, 청년 운동을 이끌며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 선거에 도전하는 것이든 말입니다.
이 자리에 모인 페미니스트 리더들은 각자의 맥락에서 민주주의와 성평등의 좌절이 무엇인지 깊이 맛보고 절망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절망과 고독, 불안은 변화를 위해 도전한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쓰디쓴 과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절망을 변화에 대한 체념과 포기가 아니라 대안적 미래를 상상하고 도전하는 용기와 낙관주의의 원천으로 승화시켜내는 것입니다. 저는 올여름 방콕의 무덥고 습한 대지에서 바로 이 일을 해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왔습니다. 절망 속에서도 대안을 상상하기를 멈추지 않는 이 든든한 동료들과 함께, 성평등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걸음을 멈추지 않으려 합니다.
21대 국회 정의당 국회의원. 다큐멘터리 〈어른이 되면〉 감독이자 동명의 책을 썼다. 현재 정의당 마포구위원회 지역위원장이자 비영리단체 ‘망원정x’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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