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꿈 이뤘지만, 여전히 '미생'입니다... 미 여자프로야구 선수 생존기 [WPBL 현장]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새긴 원년 선수들
현실은 로스터 부족부터 우버비까지 떠안아
인터뷰할 장소가 애매해 리그 사무국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복도의 박스에 앉아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김현아와 박주아. ⓒ미국 일리노이주=황혜정 객원기자
꿈을 이룬 사람의 이야기다. 그러나 꿈을 이뤘다고 끝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시작이었고, 그 시작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삶은, 언제나 그렇듯 계속된다.
미국 여자프로야구(WPBL) 역사적인 첫 시즌에, 개막전 선발 등판한 투수 김라경(26·뉴욕 하이츠)이 던진 첫 공과 개막전 4개 팀의 첫 경기 선발 라인업은 모두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전시된다. 그렇게 한국인 여성 야구선수 세 명(김라경, 김현아, 박주아)의 이름이 기록되고, 기억되게 됐다. 1999년 당시 고등학교 3학년으로 대통령배 선발투수로 등판하며 한국 최초의 여자 야구선수로 공인된 안향미와 기록되지 못했지만, 그 전후로 야구공을 끝까지 놓지 않았던 모든 여성들의 뒤늦은 성취이며, 영원히 남을 우리의 족적이다.
그러나 역사에 이름이 새겨지는 것과, 그 이름의 주인이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일은 다른 문제다. 시즌 개막 후 꼭 일주일이 지난 8월 16일, 미국 일리노이주에 위치한 스프링필드 로빈 로버츠 스타디움. WPBL 원년 시즌을 취재하기 위해 찾은 이곳에서 포수 김현아(26·보스턴 헌터스)와 김라경을 한 자리에서 만났다. "이게 현실입니다." 인터뷰를 시작하며 던진 말 그대로였다. 두 선수는 화려한 데뷔 소감 대신, 로스터 15명짜리 리그가 일주일 만에 스스로 드러낸 민낯을 담담하게, 때로는 유쾌하게 풀어놓았다.
"처음이다 보니 기자님 말씀하신 것처럼 (이 리그와 선수들의 현실이) 살짝 '미생(未生)'스럽기도 해요." 김라경의 말이다. "그런데 이게 불만으로 이어지지는 않아요. 원래 처음엔 시련이 있어야 하고, 그 불편함을 개선하려고 더 노력하게 되니까요. 그냥 더 잘해야겠다는 마음이 드는 것 같아요."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선수가, 동시에 스스로를 미생이라 부르는 자리. WPBL의 첫 시즌은 그 낙차 위에 서 있었다.
"모두가 오타니가 됐어요"...세분화되지 않은 포지션의 민낯
가장 먼저 터져 나온 건 예산상 선수를 많이 계약하지 못해 일어난 투수 부족 문제였다. 김라경은 "아무리 선발 투수로 다져진 선수라도 4~5이닝이면 체력이 고갈된다"며 "그다음을 책임져 줄 마무리 투수 같은 보직의 세분화가 필요한데, 지금은 그게 안 돼 있어서 야수가 갑자기 투수로 올라온다"고 지적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모두가 '슈퍼스타'이자 투수와 타자 모든 부분에서 대활약을 펼치는 미국 메이저리그 남자 야구선수 오타니 쇼헤이(LA 다저스)가 된 상황이다.
"오타니는 정말 위대한 선수지만, 현실적으로 근육 쓰는 게 투수와 타자가 완전히 다른데 모두가 그렇게 갈 수는 없거든요." 로스터는 15명, 그중 선발 투수는 단 3명. 경기 후반부인 5이닝을 넘어서면 눈에 띄게 경기 수준이 떨어지는 걸 선수 스스로도 체감하고 있었다. "적어도 로스터를 20명으로는 늘려주셔야 할 것 같아요."
흥미로운 건 이 지적이 허공에 흩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인터뷰 당일, 소속팀 감독이 로스터를 15명에서 16명으로 늘리겠다고 발표했고, 새로 합류할 자리는 투수 몫으로 정해졌다는 소식이 막 전해진 참이었다. "이렇게 가다가는 투수들의 팔이 다 갈려서 중간에 라인업에서 사라질 거예요." 리그가 문제를 인지하는 속도와, 선수들이 몸으로 그 문제를 먼저 겪어내는 속도 사이에는 여전히 시차가 있었다.
김라경과 팀 동료인 포수 디네이 베니테스가 서로를 격려하고 있다. ⓒWPBL 사무국 제공(사진작가 holly desautels 촬영)
전문화되지 않은 로스터의 부담은 고스란히 선수 개인에게 돌아왔다. 삼진보다는 스트라이크존 안에서 맞춰 잡는 정교한 제구로 승부하는 김라경의 스타일 때문에, 감독은 그를 유독 자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시즌 초반 팀 감독에게 "더 던질 수 있다"며 스스로 더 던지겠다고 나섰던 그는, 벌써 두 경기 만에 10이닝 가까이 던지며 체력의 한계를 실감했다. "이러다간 오히려 후반기에 팀에 더 민폐가 되겠다 싶어서 전략을 바꾸려고요. 혼자 다 짊어지려고 하면 안 될 것 같고, 일단 이 리그를 끝까지 완주하는 걸 목표로 하려고 해요." 책임감과 자기 관리 사이에서 일주일 만에 내린 방향 전환이었다.
김현아는 다른 방식으로 첫 시즌을 앓고 있었다. WPBL 개막 직전 열린 '여자야구 월드컵 예선'부터 이어진 타격 컨디션 관리의 어려움에, 이곳에 와서는 낯선 훈련 방식과 문화 적응까지 겹쳤다. 입에 맞지 않는 음식으로 한동안 잘 먹지 못했고, 그 사이 체중이 눈에 띄게 줄었다는 게 선수들 사이에서도 화제였다. 다행히 지금은 숙소에 작은 조리 도구를 들여 직접 고기를 구워 먹으며 컨디션을 되찾고 있다고 했다. 방이 다른 선수들과 멀리 떨어져 있어 "고기 냄새 항의"를 받을 일도 없다는, 웃음 섞인 여담도 곁들였다.
포수를 보고 있는 김현아의 모습. ⓒWPBL 사무국 제공(사진작가 jackie kalafut 촬영)
보이지 않는 비용...우버 콜비 5만 원
가장 뼈아픈 건 따로 있었다. 팀에 개인 차량이 지원되지 않아, 헬스장에 가려면 우버(콜택시)를 타야 한다. 비용은 무려 왕복 5만 원. "돈 벌러 왔는데 내 돈 내고 운동하고 있어요." 김라경은 이 대목에서 가장 솔직한 표정을 지었다. "운동하려고 우버비 5만 원 내는 게 너무 아까워요." 내년에 다시 오게 되면 한국 선수들끼리 국제면허증을 따서 렌터카를 함께 쓰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현대차, 기아차 최고! 연락 주십시오"라는 농담 섞인 협찬 요청에 김현아까지 가세해 현대자동차그룹 수장인 정의선 회장을 향한 애정을 표현했지만, 웃음 뒤에 남는 건 결국 원년 리그의 인프라가 아직 선수 개인의 지갑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국 프로야구(KBO)가 6개 팀, 작은 관중석에서 시작해 1300만 관중에 이르기까지 40년이 걸렸다는 이야기를 꺼내자, 김라경은 곧바로 답했다. "저희한테 그럼 4년만 주세요." 그 4년을 두 선수는 구체적으로 그렸다. 2년차에는 팀과 선수층이 늘어나길, 3년차에는 보스턴이면 보스턴, 뉴욕이면 뉴욕처럼 각 지역 연고를 두고 도는 홈경기 체제를 바랐다. 지금은 숙소도, 이동도 다른 팀 선수들과 늘 함께라 "라이벌 의식이 살짝 없다"는 게 김현아의 진단이다. "지금은 모두가 원팀 같아서, 나중엔 정말 라이벌 같은 그런 맛이 있으면 더 재밌지 않을까요." 4년차에는 평일에도 만원관중이 찾는 리그, 그리고 선수들이 제 기량을 낼 수 있을 만큼 관리된 그라운드를 그렸다.
인터뷰 말미, 두 선수는 한국의 야구를 꿈꾸는 소녀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김현아는 비인기 종목을 선택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했다. "제가 선택한 것인 만큼, 이 뛰는 동안에는 최대한 높은 레벨의 선수들과 뛰면서 많이 깨지고, 많이 경험하면서 발전할 수 있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이곳에서 잘하는 선수들이 야구를 대하고 준비하는 방식을 배우는 지금이, 자신에게는 청춘을 투자할 만한 가치 있는 시간이라고 했다. 그는 이 리그에서 뛰는 한국인 세 명이 나중에 어떤 후배가 오더라도 공유할 수 없는 감정을 지금 함께 겪고 있다는 점에도 감사를 표했다.
김라경은 처음엔 이 열악한 환경을 그대로 보여주는 게 꿈꾸는 아이들을 실망시키지 않을까 걱정해 숨기고 싶었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생각을 바꿨다. "이게 현실이고, 이 현실 속에서도 피어나는 꽃이 있기에 자랑스럽게 다 비춰주고 싶어요." 이 길이 덜 험해지도록 노력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배고팠던 시절이 있었기에 나중에 더 값지게 갚을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냥 이 배고픈 시기를 젊음으로 이겨내 볼게요."
뉴욕 하이츠 김라경(왼쪽)과 보스턴 헌터스 김현아가 다정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다. ⓒ미국 일리노이주=황혜정 객원기자
박주아가 타격 후 1루까지 전력질주하고 있다. ⓒWPBL 사무국 제공(사진작가 jackie kalafut 촬영)
지난 8월 1일(현지시간) 개막한 WPBL 첫 정규시즌이 지난 7일 팀당 15경기씩 치르며 마무리됐다. 리그에서 함께 활약 중인 또다른 한국 선수 박주아(20·샌프란시스코 파이어벨스)의 소속팀은 10승 5패로 정규시즌 우승을 차지했다. 지난 10일부터는 포스트시즌이 진행되고 있다. 1위와 4위, 2위와 3위가 먼저 맞붙는 준결승은 세 번 겨뤄 두 번 먼저 이기는 쪽이 올라가는 3전 2승제, 우승팀을 가리는 챔피언십 시리즈는 다섯 번 중 세 번을 먼저 이겨야 하는 5전 3승제로 치러진다.
내야수 박주아는 규정타석을 채운 선수 중 타율 6위에 오르며 첫 시즌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15경기 중 14경기에 나서 40타수 16안타, 타율 0.400을 기록했고, 타점 13개, 볼넷 8개를 더했다. 타자의 전체적인 공격력을 보여주는 지표인 OPS(출루율과 장타율을 더한 값)는 0.970에 달했다. 삼진으로 물러난 횟수는 단 2차례뿐이었다.
김라경은 팀이 치른 15경기 중 6경기에 등판해 21이닝을 던졌다. 한 경기가 7회까지인 WPBL에서 경기당 평균 3이닝 이상을 소화했다는 건, 쉽게 지치지 않고 길게 던지는 투수(이닝이터)라는 뜻이다. 이 중 5차례는 선발투수로 나섰다. 평균자책점(ERA)은 7.00을 기록했다.
김현아는 11경기에 출장해 수비 기회(타구를 처리해야 했던 순간) 34번 중 31번을 실책 없이 아웃으로 연결시켰다. 이 비율로 계산한 필딩 성공률(수비 성공률·FPCT) 0.912를 기록하며 안정적인 수비력을 보여줬다.
'완생(完生)'이 되기엔 아직 멀었다. 하지만 이 숫자들은, 미생(未生)들이 매일 조금씩 완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다.
이들의 생생한 목소리는 여성신문 유튜브 채널 '호호탕탕'에서 만나볼 수 있다. 미국 현지에서 담아온 영상은 여성신문 사진영상팀 손상민, 장혜진 기자의 애정 어린 시선과 세심한 손길을 거쳐 29분 분량의 다큐멘터리로 완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