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혈관 같은 부산 구도심 산 [지도 위를 걷다 부산 구덕산·승학산·엄광산·구봉산·수정산]

부산 사하구·서구·중구·동구 구도심의 산 종주
삼각점이 있는 504.1m봉은 전망이 좋아 산과 도시와 바다가 원없이 펼쳐진다.
대한민국 제1의 항구 도시인 부산은 바다뿐만 아니라 산, 강, 온천까지 품은 천혜의 자연환경으로 흔히 사포지향四抱之鄕의 도시다. 강원도 태백에서 발원해 흘러온 낙동강이 서부 평야지대를 이루고, 해안선은 동쪽 기장군 장안읍에서 남쪽 끝 다대포 몰운대에 이른다.
육지로는 금정산(800.9m)에서 다대포 몰운대에 이르는 남서 방향의 산등성이가 부산의 등뼈를 이룬다. 이 산줄기가 낙동정맥이며 부산의 지형을 크게 동서로 가른다. 낙동강을 따라 뱀처럼 구불대며 뻗어온 정맥의 끄트머리에 자리한 구봉산, 엄광산, 시약산, 승학산을 연계해 오르내리며 항구 도시와 어우러진 자연의 내밀함을 훑어보고자 한다.
중앙공원~구봉산~엄광산~구덕산~시약산~토성역 11km7부능선까지 인가 빽빽한 사람 냄새 나는 진짜 부산
시약정에 서면 지나온 산의 궤적이 한눈에 그려지고, 시가지 너머로는 부산항이 펼쳐진다.
중앙공원과 민주공원은 더위 탓인지 한가한 모습이다. 대청공원으로 더 알려진 중앙공원은 도심공원으로 원래는 대청공원과 대신공원으로 나뉘어 있었다. 1986년 대신공원을 편입해 중앙공원으로 명칭을 바꾸고 시민광장과 조각 동산을 조성했다. 이후 보수산 일대에 1999년 민주항쟁기념관이 문을 열면서 민주공원이 탄생했다. 북쪽의 충혼탑을 중심으로 한 중앙공원과 남쪽 횃불 조형물이 설치된 민주공원은 같은 공간으로 보이지만 사실 각각 별개의 공원이다.
충혼탑 왼쪽 도로변에 '구봉산, 엄광산 등산로' 표지판이 걸렸다. 발걸음을 옮겨 '동대신 숲 또랑길'로 오른다. 대낮인데도 수목이 무성한 숲길은 어두컴컴하다. 도심에 위치한 산이다 보니 샛길과 갈림길이 많다. 그럼에도 요소요소에 세워진 이정표의 안내로 길 찾기에 어려움은 없다. 꽃동산 체육시설을 지나 쉬엄쉬엄 오르면 지형도상 구봉산(404.6m)으로 표기된 옛 봉수대 터다. 널찍한 공간의 가장자리에 데크 전망대와 정자, '구봉산 봉수대' 모형이 자리한다.
시약정에 서면 지나온 산의 궤적이 한눈에 그려지고, 시가지 너머로는 부산항이 펼쳐진다.
구봉산龜峰山은 '해동지도海東地圖' 등 고지도에도 표기돼 있다. 이름은 산의 형상이 거북이가 엎드려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로부터 우리 민족이 신성하게 여기는 거북이의 등짝에 봉수대라는 화로火爐를 놓았다. 부산은 지리적으로 왜구의 침략이 잦았다. 그래서일까? 부산에는 10여 곳의 봉수대가 있었다. 이곳 봉수대는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가 없어, 가덕도 연대봉 봉수대의 연대煙臺를 축소해 만든 것이다. 정자에 올라 보지만 영도, 송도 쪽의 전망 외에는 아쉽게도 훌쩍 자란 수목들이 가려버렸다.
북항 도등導燈이 있는 안부까지는 데크 길이 있지만 왼편 산길이 더 좋다. 왜 굳이 데크를 설치했는지 의문스럽다. 시민들의 세금으로 충당했을 텐데? 완만한 산길을 오르니 구봉산 표석이 자리한다. 본래 봉수대 터에 표석이 있었다. 이곳으로 옮겨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표석의 위치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고도는 높지 않지만 작은 봉우리들의 오르내림이 잦다. 넓은 헬기장이 나타난다. 엄광산 권역에 들어선 셈이다. 서쪽으로 가면 엄광산 정상, 동쪽 산릉을 따라가면 수정산으로 이어지는 갈림목이다. 흔히 동봉(460.2m)이라 부르는 바위 봉우리에 선다. 북쪽 건너편에 백양산이, 그 너머로 금정산이 낙동정맥의 마루금을 잇는다. 산자락에는 도시의 고층 건물들이 서로 키재기를 한다. 이제 우리나라의 주거 공간은 아파트로 채워지고 있다. 좁은 국토에 효율적이고 알맞은 주거 건축양식이라 하겠다. 그렇지만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바람에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다.
벚나무가 많은 숲길은 초록의 싱싱함이 가득하다. 다시 급경사 바윗길을 올라서니 거대한 돌탑이 반긴다. 삼각점이 있는 이 봉우리(504.1m)에 무인감시 카메라도 설치돼 있다. 전망이 좋아 산과 도시와 바다가 원 없이 펼쳐진다. 멀리 장안의 달음산을 비롯해 금정산, 장산, 황령산은 물론 발아래 수정산까지다. 이 산자락들을 헤집고 들어선 부산의 시가지는 빽빽하다 못해 숨이 멎을 지경이다. 그나마 해운대 앞바다부터 용호만, 부산 북항, 영도 앞바다까지 뻥 뚫린 바다가 숨통을 열어 준다.
엄광산 역시 구봉산처럼 현재의 정상석에 관한 이견이 많다. 국토지리정보원 발행 지형도에는 이 봉우리를 엄광산 정상으로 표시하고 있다. 인근 주민들도 예전부터 삼각점이 있는 504.1m봉을 정상으로 여겼었다. 그런데 고도가 높다는 이유로 현재 자리에 정상 표석을 세운 것 같다. 엄밀히 따진다면 엄광산 최고봉(511m)은 정상석 못 미처 있는 왼쪽 헬기장이다.
멀리 강원도 태백에서 500km를 달려온 낙동정맥 길과 합류한다. 숲길도 좋으나 조망을 즐기며 걷는 능선길도 좋다. 백양산 서쪽, 낙동강을 끼고 있는 들판 사이로 강서 지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무심정無心亭' 정자 옆의 '엄광산嚴光山' 표석과 마주한다. 반가운 것은 표석이 아니라 산 이름이다. 일제에 의해 오랜 기간 고원견산高遠見山으로 불리던 것이 1995년 본래의 제 이름을 되찾았다.
꽃마을로 내려간다. 가파르던 내리막길이 차츰 누그러지며 숲길을 벗어난다. 구덕산이 눈앞이고 시약산 기상레이더 관측소도 보인다. '구덕령九德嶺'은 구덕산과 엄광산 사이에 위치한 해발 226m의 고갯길이었다. 옛날 부산포에서 구포장을 잇는 유일한 지름길이었다. 당시 이 땅에 살았던 어부, 장꾼, 보부상은 물론 전란 시 의병이 넘나들며 이곳에서 땀을 식히고 주막에서 목을 축이던 조상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다. 1970년대 국화를 시작으로 화훼단지가 조성되었으나 지금은 인근 산을 오르내리는 시민들을 상대로 많은 음식점이 성업 중이다.
구덕산을 오르는 길은 두 곳이다. '서구 종단 트레킹 숲길'로 돌아가는 산길과 '구덕문화공원'을 거치는 직등 코스가 있다. 코가 땅에 닿을 정도로 가파르고 힘들지만 낙동정맥 길인 직등 코스로 오른다. 초입의 구덕문화공원은 전원풍의 자연경관과 전통문화가 함께하는 문화와 휴식의 공간이다. 약 20,000㎡ 면적에 박물관, 식물원, 전시관, 각종 행사를 개최하는 다목적관을 비롯해 산책을 즐길 수 있는 편백숲도 있다. 인공폭포에서 서구 숲속 놀이터 앞을 지나면서 산길은 점점 경사가 가팔라진다.
꽃마을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1시간 정도 올라 구덕산九德山(545.3m) 정수리에 선다. 산 이름은 <동래부지東萊府誌>에 두송산으로 확인되며, 구덕산은 구덕사라는 절집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조망이 좋아 시가지는 말할 것도 없이 산이면 산, 바다면 바다,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의 물굽이까지 부산의 지형 모두를 볼 수 있는 최고의 조망처다. 맑은 날에는 바다 건너 쓰시마섬의 시라다케산, 그리고 아리아케산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산정은 안타깝게도 철조망을 두른 거대한 시설물이 차지하고 있다. 부산항공무선표지소다. 부산을 거치는 모든 항공기 조종사들이 표지소에서 쏴주는 전파신호를 받아 위치를 확인하고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운항하는 항행안전시설이다. '하늘길의 등대' 역할을 하는 곳이다. 철조망 옆 수로를 따라 걷는다. 굳게 잠긴 항공무선표지소 정문 옆으로 내려서면 엉뚱하게도 소나무 아래 구덕산 표석이 서 있다. 속히 제자리 찾기를 마음속으로 빌어본다.
잠시 밟게 되는 포장도로는 시약산에 설치된 '구덕산 기상레이더관측소'로 연결된다. 축구공을 올려놓은 것처럼 모양이 독특해 산 아래 도심에서도 눈길을 끄는 시설물이다. 1989년 12월에 설치된 기상레이더관측소는 비구름의 분포와 강도, 이동 방향 및 속도 파악, 기상재해 예방을 위한 것이다. 관측소 정문 못 가서 있는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약정 쉼터에 다다른다. 조망이 활짝 열려서 지나온 산의 궤적이 한눈에 그려지고, 산등성이 아래 시가지 너머로는 부산항이 펼쳐진다. 시약산 정상 표석은 기상레이더관측소 뒤편에 있다. 시약산蒔藥山(517m)은 명확하게 전해 내려오는 지명 유래는 없지만, 약초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한다.
'낙동정맥, 시약산 30m' 이정표에서 정맥 길로 내려선다. 밀성박씨 행산공파 선영을 오른편에 끼고 간다. 산자락에 다닥다닥 붙은 주택 사이를 빠져나가 허공에 걸린 보행교 '시약산 천마다리'에 이른다. 이 다리는 시약산에서 다대포 몰운대로 이어지는 낙동정맥의 가교라 할 수 있다. 여기가 대티고개로 낙동강 하구의 하단·학장·괴정 주민들이 부산 도심부로 넘나들던 고개다. 지금은 대티터널이 뚫렸고 그 밑으로 부산 지하철 1호선이 지난다.
천마다리를 건너 대티2배수지에서 이제 낙동정맥과 헤어진다. 산행의 막바지에 이르러 미로 같은 주택가의 골목길로 걷는다. '부민동 휴게 쉼터'라는 정자와 체육시설, 공중화장실이 있어 잠시 쉬어간다. 이곳이 부민산 생태공원이다. 아름드리 벚나무와 편백이 울창한 숲길을 뒤로 하니 고층 건물들이 시야를 막는다. 주택가로 돌아 나오면 '임시수도 기념관'이 있어 한번 둘러볼 만하다. 지하철 토성역은 지척이다.
산행을 위한 시작점은 중앙공원이다. 버스정류장에서 충혼탑 입구 왼편에 '구봉산, 엄광산 등산로' 안내판이 붙어 있어 산행 들머리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산행은 전체적으로 능선을 따르는 코스로 큰 어려움은 없지만, 도심의 산이라 곳곳에 갈림길이 많아 주의해야 한다. 꽃마을에서 구덕산까지는 가파른 비탈길이다. 또 시약산 천마다리를 지나 토성역(임시수도 기념관)까지는 도심마을의 골목길을 지나면서 약간 헷갈릴 수 있다.
부산 시내 각 방면에서 '중앙공원·민주공원'행 시내버스를 이용해 종점에서 내리면 된다. 해운대, 광안리 방면에서 38번, 동래 쪽에서는 43번, 영도 쪽에서는 70번, 508번이 운행한다. 지하철 1호선 자갈치역(충무동 교차로)이나 동대신역에서 마을버스 중구1번도 있다.
산행 전후 숙식은 인근 남포동 일대에서 해결하는 것이 좋겠다. 부산을 대표하는 자갈치시장과 신동아시장은 해산물 먹거리로 소문난 곳. 횟감을 눈으로 보고 골라서 곧바로 먹을 수 있어서 싱싱함만큼은 최고다. 시장 밖에도 일반적인 횟집들을 비롯해 맛집으로 유명한 곳도 있고 활어회가 아닌 숙성회를 파는 곳도 있다. 또 자갈치시장에서 유명한 꼼장어(곰장어·먹장어)집과 생선구이집들이 후각을 자극한다. 꼼장어는 가격이 만만치 않다. 꼭 먹고 싶다면 시장보다는 맛집으로 알려진 다도집(246-2611), 78년 전통원조할매꼼장어(247-6923) 등 곰장어 전문점을 권하고 싶다.
자갈치시장에서 멀지 않은 부평깡통시장은 2013년 우리나라 최초로 상설야시장을 열었다. 낮에는 생활형 전통시장, 밤에는 젊은 층과 외국인 관광객이 찾는 야시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피란 시절 허기를 달래던 비빔당면을 비롯해 떡의 식감을 살린 빵과 어묵, 돼지국밥, 빈대떡, 돼지족발 등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산행이 끝나는 지하철 토성역에서 5분 거리에 돼지국밥이 유명한 신창국밥 본점(244-1112)이 있다. 이 집 국밥의 특징은 국물이 탁하지 않고 맑다는 것이다.
하단역~승학산~내원정사~북항 도등~수정산~가야역 14km부산에는 바다도 있고, 억새의 바다도 있지요
낙동정맥을 따라 강원도 태백에서 1,300리를 흘러온 낙동강이 바다를 만나는 하구에는 다양한 모래톱이 만들어지고 있다.
승학산은 지하철 하단역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승학산 정상을 거쳐 서대신동 꽃마을에서 수정산으로 연결하는 코스는 종주 산행이나 숲길 탐방으로 나름 운치가 있다. 이번 코스는 숲길 탐방에 가깝다. 산길은 아름드리 수목들로 채워진 숲이 하늘을 가린다. 그늘진 시원한 숲길에서 수목들이 뿜어대는 피톤치드를 원 없이 만끽할 수 있다.
하단역을 나와 건국중고등학교 옆으로 올라 승학산둘레길을 만난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제석골 산림공원 방향으로 잠시 이동하면 능선 길이다. 등로는 처음부터 가파르다. 치오르는 숲길임에도 등산로는 반질반질하다. 하기야 도심의 산이다 보니 시민 누구나 찾을 수 있다. 그럴 것이 승학산의 가을은 억새가 연출하는 군무로 멋진 장관을 뽐낸다.
가파른 바윗길이 오를수록 거칠다. 산행 시작 50분이 지날 무렵 조망이 열린다. 멀리 거제도가 아련하고 가덕도를 비롯해 낙동정맥의 끝자락 다대포 일대가 한눈에 펼쳐진다. 특히 낙동정맥을 따라 강원도 태백에서 1,300리를 흘러온 낙동강의 마지막 물굽이가 장관이다.
엄광산 사면으로 돌아가는 숲길은 대낮인데도 어두컴컴하고 서늘한 냉기로 가득하다.
조망으로 눈이 즐거웠다면 이제 한 숨 돌릴 때다. 마침 정각사 갈림길 소나무 아래 의자가 놓인 쉼터가 있다. 흘러내리는 땀도 닦고 수통을 꺼내어 목도 축인다. 동아대학교에서 올라오는 능선길에 합류한다. 승학산 정상까지는 0.3km. 거리에 비해 경사가 심하다. 그렇다 보니 데크로 계단을 만들었다. 등 굽은 소나무가 자리를 지키는 곳에 전망대가 있다. 낙동강을 끼고 사하, 사상, 강서구 일대가 펼쳐진다. 멀리 김해까지 장엄한 파노라마를 볼 수 있다.
승학산乘鶴山(497m) 정수리에 올라서니 온 사방이 시원하다. 산정에 자리한 커다란 표석에는 '고려 말 무학대사가 마치 학이 나는 듯한 산세를 보고 승학산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승학산의 원래 이름은 승악산勝岳山으로 기우제를 지내는 신성하고 높은 산이라는 뜻. 승학산으로 불린 건 1909년 일제가 발행한 통감부 공보에서부터. 이는 일제가 자신들의 소망을 하늘에 전달하는 사자인 학鶴을 반영한 결과라고 한다.
햇볕이 따갑지만 그늘이 없다. 승학산을 뒤로 하고 억새평원으로 향한다. 멀리 금정산에서 줄기차게 뻗어온 낙동정맥의 마루금이 선명하다. 승학산은 올라온 방향과 내려가는 쪽의 산세가 다르다. 남서쪽은 경사가 급하고 거친 데 반해 북동쪽은 완만하고 부드럽다. 부산의 명물 승학산 억새군락지다. 하얀 꽃대를 세운 억새가 바람에 일렁이며 현란한 춤으로 은색의 물결을 이룬다. 가을이면 이 멋진 풍광을 즐기려는 시민들로 승학산이 북적인다.
부산의 명물 승학산 억새군락지는가을이면 멋진 풍광을 즐기려는 시민들로 북적인다.
승학문화 마루터 정자 옆으로 오른다. 깔딱고개 전망대에서 왔던 길을 뒤돌아본다. 억새군락지 뒤로 승학산이 부드럽게 누웠다. 그 너머로 가덕도와 진해의 산과 바다가 보인다. 발걸음을 옮기면 재넘이 마루터. 승학산과 구덕산의 경계로 네 갈래 갈림길의 쉼터다.
이제부터는 산자락을 돌아가는 숲길이다. 한동안 산비탈로 내리닫던 산길은 구덕문화공원의 산책길인 명상의 길을 만난다. 수령이 오래된 소나무를 비롯해 편백나무, 굴참나무가 숲을 이룬다. 야자 매트가 깔린 산책길에는 자연석에 시를 새긴 빗돌들이 자리한다. 배가 출출하던 참에 음식점들이 즐비한 꽃마을에 들어섰다.
오늘날 꽃마을은 그 역사만큼이나 부침을 겪었다. 구한말 부산항의 개항으로 왜관에 정착한 일본인들이 군 수송로를 조성하려고 고갯길을 넓히는 공사를 했다. 이를 계기로 외지에서 옮겨 온 빈민들이 움막과 초가 등 무허가 주택을 지어 살았다. 6·25전쟁으로 피란민이 몰려들며 마을의 규모가 커졌다. 이전에는 주로 대신동에서 사상 방면을 왕래하는 지름길이었는데, 1984년 구덕터널 개통으로 사람들이 넘나들던 옛 정취는 사라졌다. 아직도 마을로 통하는 길은 외길이라 교통이 불편한 산간의 오지 마을이다.
어탕국수가 맛있다는 한송식당에서 얼큰한 어탕국수 한 그릇으로 배를 채웠다. 엄광산으로 오르지 않고 내원정사로 간다. 절집을 드나드는 출입구인 범종루에 '도솔산 내원정사'라는 편액이 걸렸다. 불가에서 도솔천兜率天은 하늘에 사는 사람의 욕망을 이루는 외원外院과 미륵보살의 정토인 내원內院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사바세계의 모든 부처님은 반드시 이 하늘에 있다가 성불한다는 것. 현재 우리나라에는 도솔암 또는 지족암, 내원암이라는 명칭의 암자가 많다. 이 절에는 1730년(영조 6)에 조성되었다는 기록이 확실한 내원정사 목조관음보살좌상內院精舍 木造觀音普薩坐像이 있다. 이는 조선 후기 불교 미술의 황금기를 이끈 의겸義謙 스님의 유일한 보살상 작품이다.
절집 후문으로 나서면 우거진 숲이다. '숲쎈로드'로 길을 잡는다. 잠시 후 이정표가 가리키는 엄광산 정상 방향으로 가다가 석탑약수터로 꺾어 든다. 엄광산 사면으로 돌아가는 숲길이다. 대낮인데도 어두컴컴한 숲속은 서늘한 냉기로 가득하다. 아름드리나무들로 숲을 이루는 이곳은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았었다.
1900년대 초부터 수원지 보호를 위해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고, 1944년에는 자연공원으로 지정되며 여전히 개방하지 않았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현대적 상수도 시설인 구덕 수원지水源地 때문이다. 대중에게 개방된 것은 1968년 낙동강이 상수원으로 전환되면서다. 그때의 시간 덕분일까? 지금도 숲은 사람의 손보다 자연이 먼저 닿아 있는 듯하다. 특히 주목할 건 숲의 밀도다. 삼나무와 편백, 벚나무가 하늘을 가릴 만큼 빽빽해 도심의 열기를 완벽히 차단해 준다. 100년 넘게 이곳을 꿋꿋하게 지켜온 나무들은 단순한 그늘을 넘어 긴 호흡을 할 수 있게 한다.
내원정사에서 30분쯤이면 임도를 건너 다시 산 사면으로 돌아나간다. 결국 임도를 다시 만나 제5초소를 지나면 구봉산에서 엄광산으로 오르는 주능선 안부. 북항 도등導燈이 설치돼 있고 부산항을 볼 수 있는 데크도 있다. 도등은 선박이 북항으로 들어올 때 정확한 항로를 유지하도록 돕는 해양 교통시설이다. 원래 두 개가 일직선으로 서 있는데, 나머지 하나는 엄광산에 있다. 전망데크에 올라 한층 가까워진 부산항을 조망하는 여유를 부려본다.
능선 길이 아닌 편안한 숲속의 사면 길로 진행한다. 억새풀 초소, 꽃샘 약수터를 차례로 지난다. 편백 숲을 벗어나면 잠깐 시야가 트이는 공동묘지를 거쳐 길맞이 쉼터다. 임도가 교차하는 삼거리로 화장실과 약수터, 하늘이 보이지 않는 편백 숲에 평상까지 놓였다. 쉼터로 손색없는 완벽한 휴식 공간이다. 울창한 수목은 건강 생활의 활력소로 활용 가치가 충분하다. 수정산으로 가는 중간에 성터를 만난다. 비지정 문화재인 오해야항 목장 외성터다. 이 목장성은 조선시대 동래부의 남쪽 지역 전체가 말을 방목했던 목마장이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유적이다. 수정산水晶山(314.7m)은 정상 일대에서 크고 작은 수정이 많이 나왔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 하지만 수정이 채굴된 장소는 알 수 없다. 정상에 표석이 있지만 조망은 좋지 않다. 낙엽이 무성한 계절적 요인도 있을 것이다. 그나마 북쪽으로 백양산이 가깝게 다가온다.
하산은 안창마을이 보이는 철망을 통과해 동의대학교 안으로 잠시 걷는다. 정자 쉼터에서 곧장 '엄광산 나들숲길 9코스 하늘빛 길'이다.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나지막한 봉우리는 전망이 좋아 엄광산이 훤하다. 바위에 八金山팔금산(234.4m)이라 쓰여 있다. 이제 숲길 탐방도 막바지에 이른다. 갈림길을 무시하고 능선 길로만 잇는다. 숲길을 벗어나니 도심의 고층 건물들이 빽빽하다. 태양도 서쪽으로 기운다. 숲길에서 수목이 발산하는 피톤치드를 마음껏 들이마신 하루였다. 지하철 가야역에서 마무리한다.
지하철로 접근하는 것이 편리하다. 1호선 하단역에서 승학산 등산로는 크게 두 곳. 동아대학교 하단캠퍼스 정문 옆에서 시작하거나 9번출구로 나와 백용사를 거치는 코스다. 하단역 9번출구로 나서서 대로변 오른쪽 주택가로 오르면 백용사 입간판이 보인다. 조그만 절집 백용사 입구에서 산길로 접어들면 승학산둘레길을 만난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조금 이동해 능선 길로 오른다. 승학산을 지나 재넘이 마루터에서부터 수정산 가기 전 길맞이 쉼터까지는 산허리를 돌아가는 숲속 둘레길이다. 샛길이 많아 약간 헷갈릴 수 있다. 수정산에서 팔금산으로 이어 가야역까지는 능선 길로 내려서게 된다.
산행 중 거쳐 가는 꽃마을에는 카페, 슈퍼를 비롯해 다양한 먹거리 집이 많다. 오리백숙에서부터 생선구이, 추어탕, 손두부, 시락국은 물론, 어탕국수, 수제비, 칼국수, 묵채, 잔치국수 등 분식까지 골라 먹을 수 있다.
지하철 1호선과 2호선이 교차하는 서면역 일대는 소문난 유흥가로 숙식 해결이 무난한 곳이다. 산행이 끝나는 2호선 가야역에서 서면역까지는 두 정거장으로 가까운 거리이다. 특히 서면역 1번출구로 나와 서면시장 골목으로 들어서면 가게마다 돼지고기를 삶는 구수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부산의 향토 음식인 돼지국밥 골목이다. 돼지 뼈를 진하게 우려낸 육수에 편육과 밥을 말아 낸 국밥 한 그릇은 산행에 출출해진 속을 든든하게 채워 준다. 저렴한 음식값에 맛은 어느 집이든 비슷하다.
영광도서 주변에는 횟집과 해물탕, 소문난 육개장집도 있다. 서울 이태원의 경리단길에 빗대어 '전리단길'로 불리는 전포동 카페거리에도 괜찮은 먹거리집이 많다. 낡은 공구 가게가 몰려 있던 이곳은 2012년부터 크고 작은 카페가 하나 둘 생겨나면서 지금은 100여 개 점포가 어우러져 있다. 2017년 뉴욕타임스가 뽑은 '올해 가봐야 할 52곳'에 선정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