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용인 시 동북아 핵무장 도미노 우려…비핵화 원칙 지켜야

[총력분석 | “북 核무기 57개”…격랑의 한반도] 韓 없이 흥정하는 트럼프-김정은…비핵화 마지노선 위태롭다
● 트럼프, 8월 16일 한미훈련 축소…북·미 회담 재개 시도
● 이란전 장기 교착 속 여론 전환용 대북 유화 제스처로 풀이
● 北 핵 보유 의지 vs 美 비핵화 목표 간극 크지만…
● 韓 패싱 원하는 北, 회담 성사 가능성 0%는 아냐
● 비핵화 훼손 막으려면 韓美는 물론 中日과도 공조해야
● 정권 따라 요동친 대북정책, 초당적으로 일관된 노선 필요
한미연합훈련 ‘을지 자유의 방패(UFS)’가 진행 중인 8월 19일 경기 연천군 임진강에서 주한미군이 전차·장갑차 등의 도하를 돕는 개량형 부교(IRB) 설치 훈련을 하고 있다. 미국 전쟁부는 18일(현지 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한미연합훈련 기간을 단축해 21일 훈련을 조기 종료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동아DB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다시 북·미 정상회담의 불씨를 지피고 있다. 8월 16일(현지 시간) 한창 진행 중이던 한미연합훈련을 갑자기 중단시키려 한 것이 시작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북한의 김정은과 내가 매우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 비춰볼 때, 미국이 오래전에 한국과의 연합군사훈련에 참가하기로 합의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취소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점을 감안해 피트 헤그세스 전쟁부 장관에게 연합군사훈련을 상당히 축소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의 행태는 동북아에 상당한 충격파를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훈련 중단이 남북한을 모두 겨냥한 것임을 시사하며 동맹관계를 흥정 대상으로 보는 특유의 거래적 정책 결정 스타일을 다시 한번 각인 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러한 일방·즉흥·거래적 외교 방식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반복되면서 관련국들에 학습효과를 주고 있지만 이번 메시지는 무게감이 다르다. 동북아의 지정학에서 최고 난제인 한반도 비핵화에도 영향을 미치는 중차대한 함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 유화 제스처는 이란과 벌인 전쟁이 장기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생긴 국내외의 부정적 여론에서 관심을 돌리려는 시도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의 안쓰럽기까지 한 공개 구애로 몸값이 올라간 김정은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유리한 입장에 서 있다고 생각한 북한이 막판까지 줄다리기를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사안들에 대해 최대한 양보를 받아내려고 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의 실패를 기억하는 김정은은 북한 핵 보유 인정 등 확실한 성과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협상에 나서지 않으려고 할 가능성이 높다.
북·미 정상회담 열려도 양측 합의 가능성 낮아
트럼프 대통령이 원하는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다 해도 어떤 성과가 있을지에는 더욱 큰 의문부호가 붙을 수밖에 없다. 특히 최대 쟁점인 북한의 핵무기 능력에 대해 양측이 다 받아들일 수 있는 선을 어떻게 찾을 것인지가 핵심 변수다.
한국에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북·미 정상회담에서 북한 핵을 제한하고 궁극적으로 폐기하는 합의가 이뤄지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완강한 핵무기 보유 의지를 감안하면 현실적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 최근 베네수엘라와 이란의 예를 본 학습효과로 핵무기의 억지 능력을 담보하려는 북한의 의지는 더 공고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최악의 시나리오는 북·미 정상회담에서 북한이 사실상의 핵무기 보유 국가로 용인되는 것이다. 북한이 가장 바라는 시나리오이지만 한국과 일본을 포함한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있는 동맹국들의 안보는 불안해진다. 핵비확산조약(NPT·Non-Proliferation Treaty)의 미래에도 악영향을 미칠 우려가 크다. 최악의 경우에는 동북아에서 핵무장의 도미노를 촉발할 수 있다. 미국 입장에서도 이는 용인하기 어렵다.
북·미 정상회담이 성사된다면 이 두 가지 시나리오를 사이에 두고 양측의 줄다리기가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양측의 입장 차이를 감안할 때 이러한 줄다리기에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들 수밖에 없다. 북·미 정상회담이 트럼프 대통령이 원하는 대로 올해 말에 열린다 해도 양측이 만족할 만한 합의를 단기간에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보다는 앞으로 협상을 지속할 큰 틀에 합의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졸속 협의를 통해 나쁜 합의에 이르는 것보다는 앞으로의 협상 틀과 과정에 대한 절차적 합의가 차선의 선택이 될 것이다.
북·미 정상회담 재개를 바라보는 미국과 한국 조야의 시선은 여러 갈래이지만 일반화하면 두 개의 상반된 시각으로 나눌 수 있다. 미국의 경우 대북 강경파는 대화 무용론, 대북 온건파는 대화 낙관론을 펴는 경향을 보인다. 두 시각은 클린턴 행정부 이후 지난 30여 년간 미국 대통령의 성향에 따라 교차 반복돼 왔다.
대북 ‘전략적 인내’와 ‘성급한 관여’ 모두 실패
오바마 대통령 이후의 16년간으로 좁혀 보면 미국의 대북정책은 대화 단절과 정상 간 대화라는 양극단을 오갔다. 오바마 대통령 재임 기간 8년은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라는 정책하에 강력한 대북제재를 부과하고 북한의 노선 변화가 있을 때까지 대화를 유보했다. 트럼프 대통령 1기에는 명확한 정책 없이 트럼프 개인의 판단에 따른 정상 간 대화로 급진전이 일어났다. 필요한 준비 없이 최고위급 대화를 시도했다가 실패한 점을 감안해 필자는 ‘성급한 관여(hasty engagement)’로 정의하려고 한다.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의 실패로 대화가 다시 단절된 후 바이든 정부는 ‘전략적 인내’ 2.0으로 복귀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이 8월 24일(현지 시간) 트루스소셜에 2018년 6월 싱가포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만나 찍은 사진을 게재했다. 북한이 자신의 대화 제의에 냉랭한 반응을 보이는 상황에서 김 위원장과의 과거 관계를 상기시키며 대화 재개를 촉구한 것으로 풀이된다. 트럼프 대통령 트루스소셜
객관적으로 평가하면 전략적 인내와 성급한 관여의 두 정책 모두 실패했다. 지난 16년간 북한의 핵 능력이 고도화하면서 대외정책은 공세적 강경 노선으로 강화됐기 때문이다. 제재 또는 대화만으로 북한의 입장 변화를 유도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입증된 것이다. 최소한의 대화도 필요하지만 자칫 북한 핵을 용인해 주는 결과를 가져오는 부작용을 막아야 한다. 북한 핵을 용인하지 않으면서 위험을 관리하는 전략적으로 정제된 새로운 정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새로운 정책은 과거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 실패를 반복하지 않도록 ‘정교한 설계’가 필요하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시도가 과연 이러한 성찰과 설계 과정을 거쳐서 나온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북·미 정상회담이 성사되더라도 다시 실패할 가능성이 큰 이유다.
한국과의 협상을 거부하고 미국과 직접 협상하기를 고집하는 북한의 입장이 받아들여져서 북·미 대화가 재개될 수도 있다. 이때 한국은 직접 당사자로서 양국 간 대화의 목표와 전략을 명확히 하고, 이를 미국에 사전 전달해야 한다. 한국의 생각을 트럼프 행정부가 수용하고 협상에 반영토록 하기 위한 미국과의 충분한 신뢰 확보는 당연한 선결 조건이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9월 4일 공개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핵물질 생산 공장 현지 지도 사진. 노동신문
미국과의 공조는 북·미 협상의 시작 전, 도중, 타결 전을 포함한 모든 시점·정상·고위급·실무를 포함한 모든 레벨, 그리고 백악관·국무성·국방성·정보 부서를 포함하는 모든 관련 기관을 아우르는 전방위 중층으로 이뤄져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스타일을 감안할 때 정상 간 소통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이를 기초로 한 ‘톱다운’ 방식이 효율적일 것이다. 또한 일본과의 공조도 강화해야 한다. 북한 핵 위협을 공유하는 일본의 측면 지원이 대미 설득에 힘을 보탤 수 있다. 한미일 3자 협의의 활성화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한반도 문제의 직접 당사자인 한국이 손 놓고 있으면 북·미 정상회담의 재개가 ‘성급한 관여’ 2.0으로 가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준비되지 않은 협상으로 자칫 북핵을 용인하는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한국은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한국 정부는 초당적으로 지혜를 모으고 외교력을 다해 미국을 설득해 ‘전략적 관여(strategic engagement)’의 길로 인도해서 한반도에서 분쟁이 벌어질 위험을 줄이고 핵 없는 한반도를 향해 나아가는 전기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한미 공조 통해 ‘전략적 관여’의 길로 나아가야
한국이 미국에 각인해야 할 핵심 사항은 먼저 한반도 비핵화는 어떠한 경우에도 한국이 양보할 수 없는 목표라는 점이다. 한반도 비핵화는 한국뿐만 아니라 동북아 전체, 나아가 세계의 지정학 질서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문제다. 한반도 비핵화가 흔들리면 한국의 핵무장 여론을 자극함은 물론 일본, 대만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최악의 경우 핵무장이 동북아 각국에서 도미노처럼 시작될지 모른다.
북한과 미국 양국의 현실적인 협상 방안은 양측 관심 사안을 우선순위별로 한 가지씩 대응해 이행하는 로드맵 방식이 될 가능성이 크다. 북측의 관심사인 대북제재 해제, 북·미 관계 개선, 평화협정 등을 한 축에 놓고, 한미의 관심사인 북핵 동결이나 감축, 최종적으로는 폐기를 다른 축에 놓고 상응 조치의 순서를 배열하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 비핵화라는 궁극적 목표의 훼손을 막기 위해서는 북·미 정상회담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검증 조항이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 북한의 핵무기 능력을 동결하는 대신 거기에 상응하는 제재의 완화와 인도적 지원 재개를 첫 단계로 이행을 시작해 이행 과정을 검증, 평가한 후 양측이 만족하면 다음 단계의 상응 조치로 나아가는 방식이다. 이견이 발생해 중도에 이행이 중단되는 경우 자동적으로 이전 단계로 되돌리는 ‘원상 환원(snap-back)’ 조항이 상호 신뢰의 결핍을 보완하고 북핵 용인을 막는 안전판이 될 수 있다.
북·미 대화의 성립 여부와는 무관하게 남북 대화의 재개도 필요하다. 현재 모든 대화 채널이 단절된 남북 관계는 매우 위험하다. 남북 간 긴장이 고조된 상태에서는 작은 사건이나 의도되지 않은 사고가 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한반도의 화약고가 터지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해서는 남북 간 대화 채널 복원이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물론 현실 여건은 매우 어렵다. 즉흥적이고 까다로운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하는 것부터가 난관이다. 의심 많은 김정은이 한국과 미국의 의사를 받아들이게 할 방법도 찾기 어렵다. 한국의 힘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일본의 지원은 물론 중국 등 다른 동북아 관련 국가의 이해관계를 엮어 북한을 압박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대북·대외 정책에서 첨예하게 대립하는 국내 여론을 하나로 모으는 일이다. 정부마다 대북정책의 방향이 달라졌던 것은 비단 미국만의 일은 아니다. 가장 큰 이해당사자인 한국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북정책의 방향이 대화와 단절 양극단에서 흔들렸다. 주변국에 비해 국력이 약한 한국에 가장 중요한 외교적 덕목은 일관성이다. 항상 같은 태도는 아니더라도 대북정책의 방향은 정권과 관계없이 한 방향이어야 북한도 한국을 신뢰할 수 있다.
한반도의 미래를 좌우할 중대한 시점에 서 있는 우리는 시행착오로 낭비할 시간이 없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북·미 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 북한에 대해 정교하게 설계된 ‘전략적 관여’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치밀한 공조에 나서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