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클레인이 멈춘 자리, 인문 정원이 되다

[AI 시대 다시 묻는 인문학⑥] 외계 행성에 온 것 같은 제주 파호이호이 용암지질공원
● 파호이호이, ‘매끄럽게 걸을 수 있다’는 뜻
● 자연의 거대한 흐름 일부가 되는 곳
1만여 평 부지 절반이 용암으로 뒤덮인 파호이호이 라바필드 제주에는 명상과 사유의 공간이 많다. 반가사유상을 얹은 돌들.
‘AI 시대 다시 묻는 인문학’은 재단법인 지관(止觀)과 ‘신동아’가 공동 기획한 시리즈다. 인공지능의 급속한 발전이 인간의 삶과 사유 방식을 근본부터 뒤흔드는 지금, 오히려 철학과 인문학의 가치가 더욱 빛을 발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기술이 인간을 대체하는 시대일수록,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묻는 목소리는 더 절실해진다. 하지만 깨달음은 앉아서만 오는 게 아니다. 발길 닿는 곳, 눈길이 머무는 곳, 몸이 쉬는 곳에서 온다. 공간이야말로 인문학의 인프라다. 요즘에는 이런 사유의 공간을 만드는 움직임도 늘었다. 정원을 만들고 책방을 만들며 생각과 질문을 끌어내는 사람과 공간을 소개하려 한다. 이번 편은 제주 애월읍 장전리, 수천 년 전 흘러내린 용암이 그대로 굳어 땅속에 잠들어 있던 것을 드러내 인문 공간으로 만든 파호이호이 용암지질공원이다. 〈편집자 주〉
제주국제공항에서 차로 40여 분 걸려 도착한 이곳은 애월읍 장전리 중산간. ‘PAHOEHOE(파호이호이)’라고 적힌 표지석을 보고 차를 세워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시야가 트였다. 시작과 끝을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대지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눈앞을 가득 채운 건 거대한 암반이었다. 수천 년 전 이곳으로 흘러내렸을 용암이 남긴 흔적이었다. 어떤 자리는 밧줄을 꼬아놓은 듯한 새끼줄 무늬가 선명했고, 어떤 자리는 매끈한 돔 형태로 부풀어 오른 채 굳어 있었다. 한라산 북쪽 어딘가에서 화산이 폭발해 분출된 용암이 바다로 흐르다가 이 자리에서 멈춘 것이다.
제주의 용암지대라면 날카롭게 깨진 돌부리가 연상되는데 이곳은 거대한 짐승의 등가죽같이 평평했다. 표면은 매끈하게 흘러내린 채 굳어 있었고, 발바닥에 전해지는 건 저항이 아니라 완만한 곡선의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나무 그늘 하나 없는 개활지다 보니 구름의 움직임까지 온전히 눈에 담겼다. 그 아래 펼쳐진 검은 대지는 마치 다른 행성에 온 듯한 느낌까지 불러일으킨다.
파호이호이, 매끄럽게 걸을 수 있다는 뜻
제주도는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 화산활동으로 태어난 섬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제주도 화산활동은 신생대 4기, 약 180만 년 전 대륙붕을 뚫고 올라온 마그마가 바닷물과 만나 격렬한 폭발을 일으키며 시작됐다.
고려시대인 1002년부터 1007년에도 “수백 차례 반복된 분출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제주도 화산활동은 역사시대까지 이어진 셈이다. 제주라는 섬은 단 한 번의 큰 폭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매우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차례 용암이 분출되면서 형성된 ‘다생성(多生成) 화산체’라고 할 수 있다. 한라산을 정점으로 섬 전역에 360여 개의 오름(기생화산)이 흩어져 있는 것도 화산 분출이 켜켜이 쌓여 만든 흔적이다.
제주 용암의 특징은 점성이 낮은 현무암이라는 데 있다. 그만큼 잘 흘러내린다는 뜻이다. 화산이 폭발할 때 한꺼번에 터지기보다 마그마가 지표면에서부터 마치 스며 나오듯 흘러나와 넓은 지역으로 퍼져나간 것이다. 이때 용암이 굳으면서 남긴 표면은 형태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거칠고 날카로운 암괴들이 뒤엉킨 ‘아아(aa)’ 용암이고, 다른 하나는 매끈하고 부드러운 물결무늬를 그리는 ‘파호이호이(pahoehoe)’ 용암이다.
한라산에서 터진 용암이 바다로 흐르다 굳어 만들어진 용암 땅.
‘파호이호이’는 하와이 말이다. ‘매끄럽게 걸을 수 있는 땅’이라는 뜻인데, 하와이 화산지형 연구에서 처음 학술용어로 정착됐다고 한다. 파호이호이 용암은 표면이 서서히 식으면서 얇은 막을 형성하고 그 아래로 용암이 계속 흐르는 과정에서 밧줄처럼 꼬이거나 물결 같은 무늬가 만들어지면서 굳어져 ‘밧줄 용암’ ‘새끼줄 용암’이라 불리기도 한다.
‘아아 용암’은 거친 암석 덩어리가 이어져 그 위를 걷기가 힘들지만, 파호이호이 용암은 표면이 매끄러워 쉽게 걸을 수 있다. 제주는 본래 파호이호이 용암지대가 흔했지만 지금은 그 모습을 온전히 만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길을 내고 축사를 만들고 건물을 세우면서 포클레인으로 걷어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애월읍 일대에 이 용암 지질을 그대로 보존해 시민들에게 개방한 공간이 문을 열었다. ‘파호이호이 라바필드 파크 제주’가 그곳이다(라바필드는 용암지대라는 뜻의 보통명사다).
한쪽에 마련된 카페 공간에서 양재호 대표를 만났다. 어떻게 이런 독특한 공간을 만들 생각을 했는지 궁금했다.
“원래 선대(先代)에서 사놓은 땅입니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저는 대학 공부와 직장 생활을 위해 서울로 올라갔지요. 그러다 부친께서 ‘사업(제조업)을 도와달라’고 하셔서 내려오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이 땅에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워낙 가시덤불이 우거진 야산(野山)이라 안으로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바깥에서만 볼 정도였지요.”
부친은 “땅을 어떻게든 활용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공간을 만들어보면 좋겠다”고 했다고 한다.
“말뚝을 박고 측량부터 다시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부가 타인이 무단 점유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고요.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고 정리하는 데만도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처음 구상은 돌과 대나무로 뒤덮인 정원이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신문에서 조선시대 인종이 신하 김인후에게 직접 그려 하사한 ‘묵죽도(墨竹圖)’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단단한 암석이 부친 모습 같았고 자식인 저는 그 바위 위에 굳건하게 서 있는 대나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내외 대나무 정원을 여러 차례 답사한 뒤 최종 설계도를 그려서 포클레인 첫 삽을 뜨는 날이었습니다. 지표면을 걷어냈는데 이상한 모양의 암반층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그날로 공사를 중단하고 사람 손으로 걷어내기 시작했는데 파도파도 계속 나오는 겁니다.”
그는 “그때부터 제주의 용암을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파호이호이 용암지대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제주에서도 흔치 않은 자연 지형이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이걸 최대한 훼손하지 말고 그대로 살리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네 번의 설계 변경 끝에 최대한 토목공사를 하지 않고 산책로 형태로 만들었습니다. 다 완성하고 보니 올라갈 때는 한라산을 바라보고, 내려올 때는 바다를 바라보는 동선이 나오더군요. 이곳을 방문하신 분들이 한라산에서 분출한 용암이 바다로 흘러간 방향을 마치 몸으로 따라가는 것처럼 느껴보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원의 전체 부지는 1만여 평(약 3만3058m2)에 달한다. 이 중 용암이 펼쳐진 지대는 5000여 평(약 1만6530m2). 다시 양 대표 말이다.
“사실 제주 사람들에게 용암은 오랫동안 ‘돌투성이 땅’이라는 척박함의 상징이었습니다. 갈아도 갈아도 나오는 돌덩이들로 돌담을 만들었고, 건물 부자재로 썼습니다. 농사지을 땅이 없어 제주를 떠나는 사람도 많았지요. 그런데 어느 날 그 척박함이 반전을 하지요. 구멍이 숭숭 뚫린 땅은 배수가 탁월하고 무기물과 유기물이 풍부해 작물이 잘 자랍니다. 제주 녹차와 감귤 맛이 좋은 이유지요.
그동안 제주도도 급격히 개발되면서 용암 땅이 나오면 모두 깨뜨리거나 시멘트로 덮었는데 이곳은 오히려 오랫동안 내버려두는 바람에 보존된 거죠. 중산간 지대에서 이 정도 규모 용암 지형이 원형에 가깝게 보존된 곳은 국내에서도 거의 유일하다고 해요. 어떤 점에선 이 땅이 스스로를 드러낸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양 대표는 다양한 전문가 집단에게 자문하는 과정에서 제주특별자치도세계유산본부에 정보공개 청구를 하면 전문가 진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렇게 만난 사람이 제주도 화산지질 전문가이자 유네스코 지질공원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는 전용문 교수(조선대 지구과학교육과)였다. 전 교수는 2023년 수월봉을 포함한 제주도 내 13곳의 지질 대표 명소 가치를 다룬 논문을 학계 권위지로 통하는 국제지질학연합(IUGS) 학술지 ‘에피소즈(Episodes)’에 싣기도 했다. 일대를 둘러본 전 교수는 해안가에서 주로 관찰되는 파호이호이 용암이 중산간에 대규모로 보존된 것은 유례가 없다는 보고서를 냈다(2025). 제주도세계지질공원 본부는 이 보고서를 토대로 이곳을 제주지질공원 공식 파트너로 인증했고, 유네스코 마크를 부여했다.
양 대표는 “용암 위를 걷다 보면 두 발에 힘을 주고 균형을 잡아야 해서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며 “신체적으로도 자연스럽게 뇌를 쓰게 된다는 점에서 건강에도 좋지만 무엇보다 오랜 시간의 흔적을 경험하는 사색의 공간이 된다. 정원 곳곳을 ‘생각하는 정원’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울창한 대나무 숲을 구상한 것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했다.
“용암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내립니다. 이에 비해 대나무는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솟아오릅니다. 수평적인 것과 수직적인 것, 이렇게 직관적으로 시각적 대비를 통해 반대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대나무는 하루에 1m씩 자랍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요. 이렇게 죽순이 시시각각 자라고 변하는 숲에서 수천 년 전 흙 속에 묻혀 있다가 드러난 용암 땅을 함께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불교 용어인 ‘찰나와 영겁’이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오르더라고요. 빠르게 변화하는 것과 오랜 시간을 머금고 느리게 변해 가는 것을 동시에 보면서 파괴와 생성의 순환이 지금 이 순간에도 이뤄지고 있으리라는 생각도 합니다. ”
각종 사유의 공간도 별도로 마련했다. 대나무 숲 안 반가사유상 정원이 대표적이다. 여러 개의 반가사유상이 분재와 같이 돌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공원 안쪽에 돌로 쌓아 컵을 뒤집어 놓은 듯한 거대한 종모양 형태의 공간도 특별히 만든 ‘명상 공간’이다. 한두 사람 들어갈 만한 작은 공간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니, 위로 뻥 뚫린 공간에서 빛이 내려온다.
양 대표는 “저는 조경가도 건축가도 아니지만 자연이 드러낸 거대한 흔적을 보면서 자연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건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계속 덜어내고 인공적으로 훼손하지 않고 자연을 그대로 살리는 과정 자체가 제게는 수행이었다”고 했다.
“화산이 만든 땅, 수천 년의 시간이 응축된 표면 위에 서면 인간은 자연 앞에서 굉장히 미미한 존재라는 깨달음이 옵니다. 인간은 점점 더 자신이 대단하다고 느끼거나 반대로 무력하다고 느끼지만 이 공간은 어떤 점에서 세 번째 감각을 준다고 할까요.”
“인간은 자연의 거대한 흐름의 일부라는 감각이랄까요. 수천 년 전 돌덩어리들을 밟고 서 있다 보면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라는 실존에 대한 물음이 자연스럽게 떠올라요. 이곳에 오시는 분들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가셨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가져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