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엔 별의 바다, 발아래엔 구름의 바다 [일본 북알프스]

별이 저렇게 많을 리 없다. 은하수가 이토록 선명할리 없다. 살아 숨 쉬는 밤하늘. 산속의 밤은 공포가 아니었나. 잘생긴 사내 얼굴 선 같은 검은 능선의 흘러감과 감당할 수 없는 빛의 향연. 한없이 어두우면서 가장 밝게 반짝인다. 이것이 우주였나. 산을 그렇게 다녔지만, 땅만 보고 살았던가. 폰만 보고 살았던가. 이런 별의 향연은 처음이다.
빛의 속도로 오더라도 몇 억 광년이 걸려 닿은 것이니, 사람 시선에 닿은 별은 실로 귀한 인연이다. 확률로 따질 수 없는 별과의 만남. 몇 겁의 삶을
태우면 별빛에 몸을 실어 여행의 끝에 이를 수 있을까. 광활한 무로도 평원에서 홀로 두근거렸다. 이 순간을 100분의 1이라도, 산꾼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4시간 동안 별 사진을 찍었다. DSLR을 능숙하게 다루지 못하는 사진 실력 탓이었으나, 두고두고 꺼내 볼 기억의 명장면이었다. 다테야마立山(3,015m)를 오르는 날 아침, 눈을 뜨자 가래가 끓고 몸이 으슬으슬 아팠다.
일본 북알프스는 중부산악국립공원에 속한다. 1934년 다이센, 세토내해, 운젠과 함께 일본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일본을 이루는 4개의 섬 중 가장 큰 섬인 혼슈 중부 서쪽의 해안선 가까이 있어, 능선에 오르면 동해를 볼 수 있는 곳이 많다. 나가노현, 기후현, 도야마현, 니가타현에 걸쳐 남북으로 80km에 이르는 해발 3,000m급 산악지대다.
다테야마는 북알프스 북부의 심장과 같은 산이다. 일본 국립공원 전체를 통틀어 가장 오랜 역사와 종교적 뿌리를 지닌 산이다. 핵심 관광지이자, 인기 산행지다. 다테야마 산행의 베이스캠프로 통하는 무로도室堂(2,450m) 평원까지 케이블카나 버스를 타고 오를 수 있어, 일본에서도 최고의 고산 교통 인프라를 갖춘 곳이라 평가 받는다. 바쁘게 사는 현대인에게 시간 효율 높은 고산 여행지인 것.
무로도는 해발 2,450m의 고산 평원으로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곳'으로 꼽힌다. 산행이 어려운 노약자도 완만한 평원의 산장에 하룻밤 묵으며 북알프스의 신비로운 시간을 즐길 수 있다. 도야마현에 위치한 다테야마는 일본 내에서도 손꼽히는 적설량 많은 곳이다. 매년 봄이 되면 4월부터 6월까지 높이 5~15m에 이르는 설벽이 장관을 이룬다. 압도적인 대자연의 풍광을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곳이 무로도다.
다테야마는 봉우리 하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야마(3,003m). 오난지야마(3,015m), 후지노오리타테(2,999m) 세 연봉을 통칭하는 이름이다. 특히 후지산(3,776m), 하쿠산(2,702m)과 함께 일본 3대 영산靈山으로 꼽힌다. 다테야마는 슈겐도修.道와 깊은 연관이 있다. 슈겐도는 높고 험한 산에 들어가 극한의 고행을 견디며 신비한 영적 능력을 얻고자 했던 일본 특유의 산악신앙이자 수행법이다. 전쟁이 잦았던 역사와 도교, 불교, 무속, 자연 환경이 긴 세월 동안 섞인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무로도에는 유황 가스가 나오는 온천이 있는데,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는 황량한 풍경을 보고 살아 있는 지옥이라 여겨, 지고쿠타니地獄谷(지옥곡)라 부른다. 반면 다테야마 정상에 오르면 운해 위로 고산이 솟은 압도적인 경치를 볼 수 있어, 극락정토라고 여겼다. 즉 다테야마를 오르는 것은 지옥을 거쳐 정토에 이르는 수행의 과정이라 여겼다.
다테야마 전설도 영산이라 불리는 데 한몫했다. 8세기 초, 사에키 아라요리라는 소년이 아버지가 아끼던 흰 매를 쫓아 산속으로 들어갔다가 화살을 맞은 흰곰을 발견했다. 그런데 이 곰이 황금빛 아미타여래로 변해 "이 산을 열어 중생을 구제하라"는 계시를 내렸고, 이후 다테야마는 신성한 수행처로 자리 잡았다.
17세기에는 승려들이 '다테야마 만다라'라는 그림을 들고 다니며 "다테야마를 참배하면 죽은 뒤 지옥에 가지 않고 극락에 갈 수 있다"고 설파해, 많은 사람들이 다테야마를 참배의 목적으로 오르게 되었다. 오야마雄山(3,003m) 정상에 있는 신사는 과거에는 신이 머무는 신성한 곳이라 하여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었다. 지금은 몇 백 엔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갈 수 있다.
월간<산> 독자 24명과 북알프스를 걷다
여행사 브라이트스푼과 본지는 일본 다테야마 3박4일 여행을 기획했다. 독자들의 성원에 힘입어 월간<산> 밴드 공지 후 24명 정원을 금방 채웠다. 20대부터 80대까지 모든 세대를 아울러 자연에 진심인 등산인들이 모였다. 자기 체력에 맞게 무로도 산책, 오야마 산행, 다테야마 환종주로 나뉘어 대자연을 즐겼다.
좋은 사람들이 모여서일까? 일기예보에서는 비가 온다고 했다. 날짜가 다가와도 1명도 일정을 취소하지 않았고, 보답인지 날이 개었다. 최상의 컨디션은 아니었지만, 화창한 날씨에 몸과 마음이 걸을수록 좋아지고 있었다. 선두에서 브라이트스푼 베테랑 가이드 이영섭 이사가 걷고, 기자는 등산인들의 가장 뒤쪽에서 사진을 찍으며 올랐다.
무로도산장을 나선 발걸음은 완만한 눈길을 지나 이치노코시一ノ越(2,700m) 고개를 향해 서서히 고도를 높였다. 2,000m대 고산이라서일까, 몸살 기운 탓일까. 숨이 가라앉지 않는다. 뒤를 돌아보니 미쿠리가이케 연못과 초록 평원과 잔설이 아득하게 내려앉았다. 앉으면 일어나지 못할까봐 숨 돌리는 시간은 20초 내로 하여 걸음을 옮겼다. 가쁜 숨을 몰아쉴 때마다 으슬으슬하던 한기는 땀방울과 함께 흩어졌고, 폐부 깊숙이 차오르는 서늘한 고산의 공기가 흐릿했던 감각을 날카롭게 깨웠다.
고개에 이르자, 멀리 동해바다와 산 너머 북알프스가 처음 펼쳐졌다. 지방에서 처음 상경해 롯데월드타워를 보는 기분이었다. 말로만 들었던 '북알프스'가 이렇게 좋은 줄 알았다면 더 일찍 올걸 싶었다. 자동차 마니아가 포르쉐를 꿈꾸는 것처럼, 주말마다 찾고 싶은 꿀 발라놓은 거대한 세상이었다.
이치노코시산장을 지나면서부터 길은 온통 거친 너덜과 바위벽으로 표정을 바꿨다. 사람이 도저히 오를 수 없을 것 같은 험준한 능선이었다. 사람 한 명 겨우 걸을 수 있는 산길을 지그재그로 오르는 길. 옛 수행자들이 왜 이곳을 '지옥을 딛고 서는 길'이라 불렀는지 온몸으로 실감 났다. 저마다의 무게를 짊어지고 묵묵히 앞사람의 발뒤꿈치를 따라 걷는 등산인들의 뒷모습은 한 편의 경건한 순례였다.
마침내 올라선 첫 봉우리 오야마. 정상에 닿아 고개를 든 순간, 가슴을 짓누르던 모든 고통이 일순간 증발했다. 발아래로 하얀 운해가 끝없이 넘실거리고, 저 멀리 구름바다를 뚫고 솟은 야리가다케槍ヶ岳(3,180m)는 신선의 궁전처럼 성스러운 카리스마가 있었다. 압도적인 북알프스의 첩첩산중이 파노라마로 펼쳐졌다. 뭐라 말하기 어려운 압도적 자연의 펼쳐짐에 눈물이 날 뻔했다.
신기하게 이 높은 곳에 매점이 있고, 입장료를 받는 신사가 있었다. 승려가 종을 치고 복을 기원해 주는 소리가 들렸다. 승려의 기도 소리가 바람에 실려 허공으로 흩어지는 동안,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3,003m의 하늘을 가슴에 담았다.
혹시 컨디션이 나빠져 뒤처질까봐 빠르게 출발했다. 오른쪽은 칼날 같은 능선이, 왼쪽으로는 까마득한 무로도 평원이 초록과 흰색 무늬의 호랑이처럼 따라왔다. 시선을 들면 하늘과 바위만이 존재하는 순도 높은 침묵의 세계였다. 한 걸음 내딛고 멈추어 바람을 맞고, 렌즈 너머로 빛나는 동행들의 미소를 담았다.
다테야마 최고봉인 오난지야마大汝山(3,015m)는 좁은 바위봉이었다. 제대로 된 정상 표지석이 없어 귀여운 나무팻말을 들고 정상의 기쁨을 사진으로 남겼다. 둘러보니 거대한 능선이 끝없이 이어졌다. 알을 깨고 나와 다른 세상에 뚝 떨어진 기분이었다. 이 순간은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고, 누구보다 행복했다. 이렇게 놀라운 산을, 이토록 멋진 날씨에, 좋은 사람들과 함께 올 수 있다니, 하늘을 향해 저절로 감사를 했다.
바위봉우리의 출현이다. 험준한 암봉 후지노오리타테富士ノ折立(2,999m)가 삼형제 중 가장 낮지만 맵게 서있었다. 바위 사이로 길이 나있어 손발을 잘 쓰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었다. 역시 정상석은 없었다. 빵 터진 경치가 보상이었다. 눈과 초원이 뒤섞인 무로도는 기린 무늬 같았고, 호랑이 무늬 같았다. 살아 있는 야성의 산줄기인 건 분명했다.
롤러코스터의 직하강 질주 같은 내리막이었다. 산행 내내 경외심이 드는 파노라마가 펼쳐지지만 한 발 잘못 디디면 큰 추락을 할 수 있어 대부분의 정신은 걸음에 집중했다. 추락하듯 고도를 내리면 긴 오르막의 반복이었다. 아름다움에는 대가가 필요했다. 마사고다케.砂岳(2,861m)에 닿자 일행들이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산장에서 싸준 도시락, 일본 스타일 밥을 먹으며, 먼 행성이 아닌 지구의 일본임을 자각했다.
극락정토는 어디 가고 다시 지옥행인가. 다테야마 원점회귀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인 벳산別山(2,874m)의 오르막이 숨통을 조여 온다. '다를 별別'자가 아니라 다른 별로 가는 길인 것만 같다. 키 작은 눈잣나무의 싱그러움에 힘을 얻어 꾸역꾸역 오르자, 다시 극락이다. 작은 신사 지붕이 있는 정상은 국내 산과 비교하기 어려운 막강한 경치를 자랑한다. 모처럼 모인 일행들이 흥에 겨워 단체사진을 찍으며 환호한다. 저절로 환성이 터지는 정상이 얼마만인가. 성취감이 온 몸을 감싼다.
안심하기엔 이르다. 방심할 수 없는 하산길이 남았다. 이어지는 능선도 광대하다. 험준한 암벽에 드리운 짙은 음영과 빙하가 깎아지른 자국들. 자연이 빚어낸 가장 원초적이고 장엄한 조각상 앞에서 한동안 말을 잃고 서 있었다. 감히 정복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수 없는, 오직 경외심으로 볼 수밖에 없는 신의 영역이었다.
'바위 제왕'이라 불리는 츠루기다케劒岳(2,999m)가 보이는 능선이지만, 구름에 가렸다. 산장이 있는 벳산노리고에別山.越 고개에서 숨을 돌리는데 사람들의 탄성이 들린다. 구름이 벗겨지며 츠루기다케의 '바위 검'다운 날카로운 산세가 드러난다. 오늘은 저 산을 타지 않음을 감사한다. 내일 츠루기다케를 간다는 일본 여성들의 배낭에는 헬멧과 로프가 감겨 있다.
고도를 내리는 일만 남았다. 라이초자카雷鳥坂의 가파른 자갈 비탈을 타고 내려오는 길. 무릎이 묵직하다. 8시간 넘게 산행한 피로가 몰려올 즈음, 멀리 분지 한가운데 알록달록 수놓인 라이초다이라雷鳥. 야영장의 텐트들이 아늑하게 시야에 든다. 한여름의 잔설에 놀라며 비닐을 꺼내 눈썰매를 타는 일행의 모습에 피로가 말끔히 사라진다. 돌다리를 따라 계곡을 건너자 위에서 봤던 라이초다이라 야영장이다.
그만 산행을 끝내고 싶은데, 급경사 돌계단의 시작이다. 하산을 마친 후 다시 산행을 시작하는 분위기라, 숨을 더 가쁘게 몰아쉬게 된다. 살아 있는 지옥이라는 지고쿠니다니는 유황 연기가 펄펄 솟구친다. 매캐하여 숨 쉬기가 불편해 빠르게 지난다. 옛날 순례객들은 살아서 지옥을 체험해 죄를 소멸시키는 고행으로 이곳을 찾아왔다. 유황 연기를 마시며 기침을 하고 온천 열기를 견디는 것 자체가 전생과 이번 생의 악업을 불태우는 참회 의식이었다고 한다. 지옥을 지나 오야마(3,003m) 정상에서 일출을 맞으면, 옛 자아는 죽고 순결한 영혼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믿었다.
순결한 영혼으로 다시 태어나지는 못했지만, 당일 산행으로 작은 지옥과 극락을 오간 것은 사실이다. 어젯밤 수억 광년을 건너와 정수리 위로 쏟아지던 별빛, 능선의 서늘한 바람, 극한의 깔딱고개를 딛고 마주한 3,000m대 북알프스의 감격, 서로의 보폭을 맞추며 9시간을 함께 걸어낸 일행의 따뜻한 온기까지. 흥건히 땀이 빠져나가고, 정신도 새롭게 거듭난 느낌이다. 무로도를 떠나는 날, 3일 동안 산에 흠뻑 빠졌는지, 한 발 한 발이 아쉽다. 가슴속에는 꺼지지 않을 거대한 은하수 하나가 남아 있었다.
1. 어려운 산길은 없다. 지리산 주능선을 종주하고, 설악산 공룡능선 완주할 정도면 가능하다.
2. 다만 고도감 높은 낭떠러지를 옆에 두고 걷는 길이 많다. 방심과 실수는 큰 사고로 이어지므로 집중력을 요하는 구간이 많다.
3. 국내 10km 산행 난이도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국내 산행 능력과 상관없이 사람에 따라 고소증세가 올 수 있다. 두통과 메스꺼움, 구토, 급격한 체력 저하 등.
4. 국내 산행보다 걷는 속도를 늦추고, 물과 간식을 꾸준히 섭취해야 한다.
5. 고산에서는 거리보다 소요 시간에 중점을 둔다. 1km가 안 되는 구간이 가파르고 위험해 1시간 이상 걸리는 곳이 많다.
6. 컨디션 저하가 심하면 바로 되돌아서 하산한다. 다테야마 연봉에서 마사고다케까지 중간 탈출로가 없다. 혼자 모르는 길로 하산하는 것보다 왔던 길을 돌아가는 것이 낫다.
7. 오야마(3,003m). 오난지야마(3,015m), 후지노오리타테(2,999m)가 다테야마 3연봉이다. 후지노오리타테에서 벳산을 거쳐 다테야마 무로도산장까지 돌아오는 후반 산행도 가파른 오르 내림이 많다. 후지노오리타테까지 갔다가 왔던 길을 되돌아서 하산하는 것도 안정적인 산행 방법이다.
8. 야영장에 닿으면 산행이 끝난 것 같지만, 돌계단 비탈을 거쳐 고도 200m를 높여야 다테야마 무로도산장에 닿는다.
9. 야영한다면 벳산 방향으로 오르는 것이 낫다.
10. 곳곳에 산장과 매점이 있다. 이치노코시산장, 오야마매점, 오난지야마매점, 쿠라노스케산장, 벳산노리고에 고개 산장, 라이초소 산장 등.
울산에서 온 30년 등산 콤비 | 김해곤·임정희 부부
부부가 함께 산을 탄 지 어느덧 30여 년이다. 백두대간을 두 번 완주하고 100대 명산을 모두 오른 울산의 베테랑 산꾼 부부지만, 이번 북알프스 다테야마 산행은 감회가 남달랐다. 과거 이곳을 찾았으나 폭설로 오야마 정상 문턱에서 돌아서야 했던 아쉬움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 임정희씨의 신청으로 다시 찾은 다테야마에서 부부는 청명한 날씨 요정의 축복 속에 정상을 오르고 벳산을 거쳐 원점회귀 종주에 성공했다. 70대의 고령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청년처럼 걷는 부부는 긴 세월 발을 맞춰온 콤비답게 서로 챙기는 모습이 다투는 것처럼 오해를 사기도 했다.
80세 참가자의 현명한 선택 | 이병용 독자
과거 직장 산악회 총무를 수십 년간 맡으며 사계절 내내 지리산과 설악산을 누볐던 80세의 이병룡 독자는 누구보다 깊은 눈으로 능선과 평원을 감상했다. "오랫동안 이용하며 단골이 된 브라이트스푼과 월간산이 함께 기획한 여행 소식을 듣고 주저 없이 다테야마를 찾았다"는 그는 이치노코시산장(2,705m)에서 스스로 하산을 결정했다. 동행한 일행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한 배려이자, 자신의 한계를 정확히 인정할 줄 아는 베테랑다운 결단이었다. 목표 앞에서 돌아설 줄 아는 용기, 그리고 산장에서 나눈 따뜻한 대화 속에서 덕과 지혜를 갖춘 산 선배의 귀품이 느껴졌다.
다리 다쳐도 포기할 수 없었던 첫 가족 산행 | 이길구·조원증 부부 가족
출발 이틀 전, 어머니 이길구씨가 다리를 다치는 예기치 못한 사고가 일어났다. 극심한 통증에 포기를 고민하기도 했지만, 장성한 아들(조종우)과 딸(조정예)이 부모를 위해 직접 예약하고 마련해 준 '생애 첫 네 식구만의 여행'을 놓칠 수는 없었다. 평소 월간<산> 애독자이자 산을 사랑하는 아버지 조씨를 필두로 온 가족이 북알프스로 향했다. 조원증씨는 "무로도 평원을 실컷 볼 수 있어 좋았다"며 "어려운 상황에도 우리 가족이 보폭을 맞추며 함께 호흡한 시간은 그 어떤 명산을 오르는 순간보다 값진 행복으로 남았다"고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81세에 첫 해외 원정, "스위스 부럽지 않았다" | 김영호 독자
50대에 산에 입문해 30년간 국내 명산과 백두대간 3회 완주를 달성한 김영호 독자는 81세의 나이에 생애 첫 해외 트레킹에 도전했다. 월간<산> 정기구독 중 접한 스위스 알프스 기사가 그의 가슴에 다시 불을 지폈다. '나이는 줄일 수 없지만 배낭 무게는 덜어낼 수 있다'는 신조로 묵묵히 한 발 한 발 내디딘 그는 놀랍게도 팀의 선두에서 흔들림 없는 페이스를 유지했다. 장쾌하게 뻗은 능선에서 지리산 천왕봉의 웅장함을 떠올린 그는 스위스 부럽지 않은 감동을 가슴에 품고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만끽했다.
TMB와 옥산을 거쳐 마주한 대자연 | 박정희 독자
젊은 시절부터 지리산 반야봉의 매력에 흠뻑 빠져 산을 탔고 대만 옥산, 몽블랑(TMB) 일주까지 마친 박정희 독자에게도 북알프스는 특별했다. 이탈리아 돌로미티 트레킹 일정이 무산된 후 우연히 합류하게 된 다테야마 능선은 그가 걸었던 몽블랑과 캐나다 로키의 장엄함을 고스란히 떠올리게 했다. "거대한 산세와 깊은 계곡이 만들어내는 압도적인 스케일에 감탄했다"는 그는 "단풍 짙은 가을에 다시 배낭을 메고 찾아오겠다"고 말했다.
꼴찌가 일궈낸 3,000m의 기적 | 김재은 독자
평소 북한산 족두리봉과 백운대를 여유롭게 오르내리던 김재은 독자에게 3,000m급 고봉은 거대한 벽과 같았다. 북한산 외에 다른 국내 명산 산행 경험이 많지 않은 그에게 큰 도전이었다고 한다. 그는 "지난해 첫 일본 트레킹에서 대열의 맨 뒤를 지키며 압도적 꼴찌를 경험했다"며 이번 여행을 앞두고는 일행들에게 민폐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서로를 끌어주고 밀어주는 원정대의 온기 속에서 그는 마침내 정상을 밟았다. 김재은씨는 "푸른 하늘과 눈 덮인 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순간, 두려움을 이겨내고 한계를 뛰어넘은 자신을 향한 뜨거운 자부심이 차올랐다"고 밝혔다.
산에서 비워낸 세상의 근심 | 김주남 독자
의사인 김주남 독자는 열혈 산꾼인 아내의 든든한 권유로 북알프스 여행에 참가했다. 안나푸르나와 돌로미티를 거치며 점차 산의 깊은 매력에 빠져든 그는 "이번 다테야마 능선에서 진정한 내면의 평온을 마주했다"고 한다. 병원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며 "산처럼 컸던 일상의 번뇌가 3,000m 고봉에 서자 먼지처럼 작아지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했다"고 한다. 맑은 공기 속에서 가슴을 하얗게 비워내는 명산의 힘을 온몸으로 실감한 산행이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연골 수술 극복한 엄마와 졸업반 딸의 동행 | 윤보영·김도연 독자 모녀
과거 네팔 안나푸르나를 넘나들었지만 무릎 연골 수술 후 큰 산을 찾지 못했던 윤보영 독자. 대학 졸업을 앞둔 딸 도연씨에게 특별한 추억을 선물하고자 7년 만에 용기를 냈다. 어릴 적 엄마를 따라 산을 타던 딸은 어느새 훌쩍 자라 하산길 너덜지대에서 아픈 엄마의 무릎을 걱정하며 곁을 든든히 지키는 페이스메이커가 되어 있었다. 험난한 북알프스 풀코스를 함께 완주한 모녀는 서로를 향한 깊은 신뢰를 확인하며, 사회로 첫발을 내딛는 딸의 앞날을 향해 힘찬 응원을 보냈다.
40년 지기 절친이 함께 오른 3,015m | 김원종·김성곤 독자
월간<산>의 오랜 애독자인 김원종 독자는 5년 전, 40년 지기 대학 동창 김성곤씨에게 직접 고급 등산화와 스틱을 쥐여 주며 산으로 이끌었다. 혼자만의 산행 대신 친구와 함께 걷는 즐거움을 나누기 위해서였다. 두 친구가 의기투합해 도전한 첫 해외 원정길, 김원종씨는 "북알프스의 엄청난 풍광을 보며 벅찬 감동을 받았고, 체력적으로도 자신감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생애 최고 고도를 경신하며 눈 덮인 연봉을 바라보는 내내, 두 사람은 농담을 주고받고 응원하며 우정을 다졌다.
마라토너와 40년 산꾼, 동문 3인방의 저력 | 표기성·이상호·김명학 독자
말레이시아 키나발루(4,095m) 등반을 함께했던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고등학교 동문 3인방이 다시 뭉쳤다. 산행을 위해 매일 새벽 2시간씩 체력을 다진 표기성씨, 하루에 아파트 20층을 다섯 번씩 오르내리며 1,000m 표고차에 대비한 40년 산꾼 이상호씨, 풀코스 마라톤을 80회 완주한 강철 체력으로 쉬지 않고 걸음을 옮긴 김명학씨. 각자의 방식으로 철저히 준비한 세 사람은 완벽한 날씨 속에서 북알프스의 웅장한 능선을 내달렸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세 남자의 우정은 다테야마 정상에서 더욱 견고해졌다.